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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생인 최태원 SK회장은 몇 해 전만 해도 주요 그룹 총수들 중에 막내 축에 속했다. 그러다 이건희 구본무 조양호 회장이 작고하고, 정몽구 허창수 박삼구 조석래 회장 등이 줄줄이 퇴장하면서, 현재 재계는 이재용(삼성) 정의선(현대차) 구광모(LG) 조원태(대한항공) 정용진(신세계) 박정원(두산) 조현준(효성) 회장 등 창업 3~4세대, 나이로는 40~50대가 주류가 된 상태다. 소용돌이치듯 이뤄진 세대교체 속에 최 회장은 갑자기 맏형급이 되었다. 그보다 연장자는 김승연(한화) 신동빈(롯데) 허태수(GS) 회장 정도다.
우리나라 대표 기업단체인 대한상의 차기 회장에 추대됨으로써 최 회장은 이제 민간경제계 수장이 된다. 명예로운 건 맞지만 절대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 최종현 회장이 생전에 전경련을 이끌었기 때문에 '대를 이은 경제단체장'이란 말도 나온다. 그러나 소수 재벌을 대표해 정·관계와 잘 지내면 충분했던 그 시절 전경련 회장과, 모든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며 반기업정서가 강한 정부와 국회를 상대해야 하는 지금 상의 회장은 전혀 다르다. 무슨 특혜를 누리는 자리도 아니고, 오히려 SK입장에선 사업상 제약만 더 커지게 됐다. 이런 걸 모를 리 없음에도 최 회장이 상의 회장직을 받아들인 데에는 사회적 책임이나 시대적 사명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일각에선 힘센 오너가 왔으니 중대재해처벌법 등 속칭 '반기업입법' 좀 막아주고 주 52시간제도 돌려놓길 기대하는 것 같은데, 사실 이런 건 상의 회장 능력 밖의 일이다. 필요하면 경제 현안에 대해 강한 입장 표명도 하고 청와대나 국회도 찾아다녀야겠지만, 그보단 이제 우리나라 대표기업인으로서 '최태원 회장'이기 때문에 가능한 두 가지 일에 꼭 집중해 줬으면 한다.
첫 번째는 메시지다.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 된 지 오래이고 글로벌 톱레벨 기업도 많아졌지만, 기업인들로부터 그에 걸맞은 메시지를 들은 기억이 없다. JP모건의 제이미 다이먼, 애플의 팀 쿡,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등 미국 간판 CEO들의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은 지난해 수십 년간 금과옥조처럼 여겨온 '주주이익 극대화'를 폐기하고 이젠 직원과 고객, 거래처 나아가 지역사회와 국가에까지 환경 공정 인재투자 등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는 새로운 기업경영의 목표를 공식 천명했다. 전 세계 경제인들의 토론장인 다보스포럼도 지난해 주주자본주의 대신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최 회장은 사회적 가치 구현을 기업 경영의 핵심목표 중 하나로 실천해 온, 보기드문 기업인이다. 가장 자신있는 분야는 아무래도 ESG이겠지만, 꼭 그게 아니어도 된다. 저출산 고령화도 좋고, 교육문제도 좋고, 4차 산업혁명시대와 플랫폼경제도 좋다. 한국 경제가 가야할 방향, 한국 기업이 고민해야 할 지점에 대한 큰 메시지를 제시해 주길 바란다.
두 번째는 네트워크다. 최 회장은 수많은 해외 사업을 통해 두터운 인맥을 쌓았고, 다보스포럼 패널로 공식 초청될 만큼 글로벌 경영인 사회에선 핵심 인사가 됐다. 이 풍부한 네트워크가 개인과 SK를 넘어, 한국 기업과 한국 경제의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해 줬으면 한다. 언젠가부터 실종되어 버린 민간경제 외교를, 최 회장이 이 네트워크를 통해 복원해 주길 기대한다. 막힌 한일관계의 돌파구가 될 수도 있고, 한미 한중관계에서도 핵심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본다.
최 회장은 구 시대의 끝자락과 새 시대의 시작을 모두 겪은 기업인이다. 성공스토리도 많이 썼다. 한국 대표기업가로서 해 줄 얘기, 보여 줄 모습이 많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