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울수록 간절해지는 농담

입력
2021.02.02 22:00
27면


몇 년 전 런던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시내의 펍에서 남편과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 테이블에 있던 중년남성분이 사레에 들린 모양이었다. 기침을 하던 그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하게 하는 말 "slowly dying(서서히 죽어가고 있어요.)." 예상치 못한 그 농담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더 밝아졌다. 남편과 나는 아직까지도 기침을 할 때면 그 농담을 써먹곤 한다.

요즘 지하철 안에서 누군가 아주 작은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경계하는 시선이 따갑게 꽂힌다.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라 'slowly dying' 같은 농담은커녕 오히려 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빛에 실제로 누군가 죽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예민해져 있는 공공장소의 공기는 몹시도 무겁고 싸늘하다. 모두가 미간에 힘을 주고 서로를 경계하는 분위기는 때로 견디기 힘들다.

웃음을 잃어버린 세상은 너무 끔찍해서 상상하기도 싫다. 아무리 심각하고 어려운 시기라고 해도 웃음까지 잃으란 법은 없다. 오히려 어려운 시기일수록 일부러라도 즐거운 일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다. 코로나가 한창 확산되던 때에 호주에서 시작된 '쓰레기통 외출(Bin Isolation Outing)'도 무거운 분위기를 즐겁게 견뎌보고자 했던 재미난 사례 중의 하나다. 격리로 인해 외출이 어려워진 사람들이 쓰레기 버리는 시간을 이용해 우스꽝스러운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어 공유를 했다. 이는 유행처럼 번져 많은 이들이 함께했고 또 웃음을 나누었다.

답답한 분위기에서 던져진 적재적소의 농담이 숨통을 트이게 하고, 자꾸만 생각나는 재밌는 얘기는 무거운 하루를 건너갈 힘이 되어준다. 유머는 성숙한 방어기제이기도 해서 심리적인 손상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갈등 상황에서 유머를 통해 상대와 나의 심리적 부담을 낮추고 공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윤활유가 되어주는 것이다.

블랙 유머의 대가로 알려진 미국의 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은 2차 대전에 참전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전쟁의 공포 속에서도 사람들을 견디게 한 건 농담이었다고 회고한다. 폭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지하실에 숨어서 농담으로 서로를 위안했다는 것이다. 저서를 통해 말하기를 유머가 아스피린처럼 아픔을 달래준다며 자신은 글을 통해 웃음으로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고 싶었단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야말로 농담이 절실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힘든 일을 겪으면 나도 모르게 시야가 좁아져 나 자신밖에 보지 못하고 또 모든 걸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지나치게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으면 우울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잠깐이라도 힘을 빼고 시선을 바깥으로 돌려 즐거움이 될 만한 것을 찾아보자. 사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것도 좋고 유머 콘텐츠를 찾아보는 것도 좋다. 불안과 우울 속에서 길어올린 농담은 그야말로 산소마스크가 되어줄 것이다. 터지는 웃음에 긴장이 풀리고 걱정과 두려움으로부터 잠깐이나마 해방되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면 충분하다.

속히 코로나가 사라져 서로를 살벌하게 경계할 필요가 없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하지만 어려운 시기가 지속되더라도 부디 농담과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김혜령 작가ㆍ상담심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