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통상자원부가 생산했다가 감사원 감사를 앞두고 삭제한 '북한 원전 건설' 파일에는 북한에 직접 원전을 건설하는 방안 외에도 비무장지대(DMZ) 내 건설과 대북 송전(送戰) 등 3가지 가량의 구체적 시나리오가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과연 이들 시나리오는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원자력 업계와 외교가에선 아무리 '시나리오'라지만, 북핵을 둘러싼 외교적 환경은 외면한 "조악한 수준"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1일 산업부가 공개한 2018년 5월 14일 작성된 '북한지역 원전 건설 추진 방안'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금호지구 활용 △DMZ 활용 △신한울 3·4호기를 활용한 송전(送電) 등 3가지 안(案)이 담겼다. 정부 당국자와 전문가들은 "어떤 부지에서 어떤 방식으로 전력을 공급하든 북한에 경제적 이득을 안겨주는 점에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에 저촉된다"고 지적했다. 산업부 역시 '검토 의견'을 통해 "북미 간 비핵화 조치 내용과 수준에 따라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 구체적 추진 방안 도출에 한계가 있다"고 문건에 적었다.
산업부는 이 문건에서 그나마 "1안(금호지구 방안)이 설득력 있다"고 평가했다. 금호지구란 1994년 북미 간 제네바 합의에 따라 설립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경수로 2기를 짓다 중단한 함경남도 신포시 금호지구를 뜻한다. 이미 한 차례 시도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생각해볼 수 있는 시나리오지만, 북한의 비핵화 이전에는 추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상식에 가깝다.
천영우 전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은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북한에 원전을 짓는다는 것은 북한의 핵무기 폐기 완료 뒤 핵확산금지조약(NPT) 복귀는 물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감시를 받아야 가능한 것은 물론 원전 자체에 미국 기술이 들어가 있는 탓에 별도로 미국의 동의도 얻어야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설령 북한 비핵화가 완료됐다 한들 미국이 북한 내 원전 건설에 동의할지는 미지수란 얘기다. 산업부 역시 문건에서 "사용 후 핵연료 통제가 어려워 미국 등 주요 이해관계자와 협의가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DMZ 내 건설 시나리오의 경우 더욱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남북 간 화력이 집중된 곳에서 군사적 긴장감을 감수하면서 DMZ를 건설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전혀 없어서다. 임만성 카이스트(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국내 원전이 모두 바닷가 인근에 건설된 것은 용수공급 문제는 물론 핵물질 운반 장비를 운송할 만한 육로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이런 점에서 DMZ가 원전 건설 장소로 적합할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산업부도 이런 측면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라면서 "(DMZ 원전 시나리오는) 한반도 평화 실현에 대한 정부의 신념과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차원이 아니겠느냐"고 해석했다.
DMZ는 정전협정에 따라 유엔사 관할에 해당한다. 남북이 합의했더라도 유엔사의 실질적 주인인 미국과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군 고위 관계자는 "DMZ에 매설된 지뢰 제거에만 몇년이 걸릴지 모른다"면서 "북한이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은 시설들도 있을텐데, 북한이 이를 받아들일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결정에 따라 건설이 중단된 신한울 3·4호기를 활용한 송전 방안도 안보리의 대북 제재에 저촉되기는 마찬가지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한에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준다는 점에서 전력 공급도 '벌크캐시(대량 현금)'"라고 지적했다.
산업부는 문건에서 "에너지 전환 정책의 수정에 대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도 밝혔다. 신한울 3·4호기의 건설을 재개할 경우 정부 스스로 탈(脫)원전 기조를 뒤집는 데 따르는 여론 반발을 이미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