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론 뭘 해도 반도체, 없어서 못판다"

입력
2021.02.01 20:00
24면

편집자주

모든 문제의 답은 현장에 있습니다. 박일근 논설위원이 살아 숨쉬는 우리 경제의 산업 현장과 부동산 시장을 직접 찾아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지난달 26일 경기 안성시 제1일반산업단지에 자리 잡은 코미코 본사. 개당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반도체 생산 장비 부품 중엔 마모되거나 오염이 되면 폐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코미코는 이를 코팅하거나 세정하는 방식으로 부품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기업이다. 이날도 정문 앞엔 재탄생한 반도체 장비 부품을 가득 실은 대형 트럭들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DB하이텍 등으로 떠나기 위해 분주히 들락거리고 있었다. 도경주 코미코 부사장은 “물류 차량만 38대”라며 “최근 반도체 생산 라인이 어디나 24시간 풀가동되면서 납기가 조금만 늦어도 비상이 걸리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지침에 따라 체온부터 잰 뒤 본관 안으로 들어서니 ‘체임버 솔루션 프로바이더’(Chamber Solution Provider)란 문구가 맨처음 눈길을 끌었다. 체임버란 반도체 재료인 얇은 원판 모양의 웨이퍼를 진공 고온 고압 상태에서 가공해 반도체 소자로 만드는 원통형 장비를 일컫는다. 반도체 생산 공정의 대부분은 체임버 안에서 이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결사가 되겠다는 게 회사의 각오다.

웨이퍼를 체임버 안에 넣은 뒤 초미세 전기 회로를 특수 가스와 용액으로 새기거나 깎아내고 부식시키거나 층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오염과 마모는 피할 수 없다. 이 경우 예전엔 새로운 부품으로 교체해야 했다. 해외 부품은 값도 값이지만 수입에 시간이 오래 걸려 제때 공급받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코미코가 국산화에 성공하며 문제를 풀었다. 성능이 원래 제품을 뛰어넘는 경우도 생겼다. 대만의 세계적 반도체 기업인 TSMC가 코미코를 찾아와 세정과 코팅을 의뢰할 정도다. 이런 고객사 요청이 이어지며 해외 진출도 일찌감치 이뤄졌다. 세정과 코팅은 반도체 생산 현장과 가까운 곳에서 진행돼야 하기 때문이다. 코미코는 현재 미국, 중국, 대만, 싱가포르 등에 거점을 두고 있다. TSMC 이외에도 인텔, 마이크론, TI, UMC 등 글로벌 10대 반도체 회사와 모두 거래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미국의 중국 견제는 K반도체 기회

방진복을 입고 3층 작업 라인으로 들어서니 방진 마스크와 귀마개, 보안경, 안전화를 신은 젊은 근로자들이 각자의 코팅룸 밖에서 유리창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푸른색 플라스마 불꽃으로 세라믹 파우더를 뿌려 자동차휠 모양의 부품을 절연체로 코팅하는 작업이다. 산소농도 현황판은 20.9%를 가리키고 있었다. 미국에서 개당 2,000만원에 수입되던 이 부품은 5년 전 국산화가 이뤄져 지금은 1,000만원에 공급되고 있다. 체임버 부품은 종류에 따라 짧으면 1주일, 길면 3개월마다 교체해야 한다. 국산화를 통해 재활용할 수 있는 부품 수가 늘어날수록 생산 원가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SK하이닉스도 상생협력프로그램에 따라 코미코에 관련 연구·개발 인력과 기술을 지원했다. 결과적으로 SK하이닉스의 경쟁력도 높아졌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철학에도 부합한다.

코팅룸에서 새롭게 태어난 부품은 1층으로 옮겨져 다시 세정과 건조, 검사를 거친다. 이 과정은 클래스100 기준으로 진행된다. 클래스란 클린룸의 청정도를 나타내는 등급으로, 클래스 100은 가로 세로 높이가 30cm인 입방체 안에 사람 머리카락 직경 1,000분의 1 크기 먼지가 100개를 넘지 않는다는 뜻이다. 최종 검사를 통과하면 제조 업체로 공급되고 이렇게 한 번 공급된 부품에 대한 모든 데이터는 서버에 저장돼 관리된다.

사실 한국 반도체 업종의 활기는 미국의 중국 반도체 견제와 무관하지 않다. 최용하 코미코 대표는 “미국이 중국 반도체 기업인 SMIC에 대한 첨단 장비 공급을 막아 반도체 굴기를 용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며 “미래의 패권을 좌우할 반도체를 절대 빼앗기지 않겠다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19로 배달과 택배 서비스가 크게 늘었는데 앱으로 들어온 정보가 서버에 저장될 때 모두 반도체가 쓰인다”며 “자율주행차가 늘어나면 반도체 센서는 더 많아져야 하고 이러한 정보를 처리하고 제어까지 해야 하는데 이것도 모두 반도체”라고 설명했다. 최 대표는 “체임버 부품의 오염과 불순물을 얼마나 줄이고 파티클(먼지)을 제거하느냐가 반도체 수율(생산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며 “장비와 협력업체 등 반도체 전체 생태계의 경쟁력이 높아져야 K반도체의 글로벌 경쟁력도 올라간다”고 말했다. 그는 “협력업체 간 출혈 경쟁을 유도하기보다 전문 분야에 특화할 수 있도록 육성하고 지속적인 기술력 향상을 꾀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K반도체 생태계가 건강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3년간 1,000억원을 투자한 코미코는 앞으로 3년간 3,000억원을 추가 투자할 계획이다.

안성공단에서 북쪽으로 40여분 거리인 경기 이천시 호법면의 유진테크 본사.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 중 웨이퍼를 낱개 단위로 가공하는 싱글 웨이퍼 장비를 제작하는 기업이다. 최근에는 웨이퍼를 묶음으로 처리하는 배치(batch) 장비도 만들고 있다. 대당 400만달러에 달하는 이 장비는 지난 30여년간 도쿄일렉트론(TEL)이나 고쿠사이일렉트릭 등 일본 제품들이 독점해왔다. 유진테크는 SK하이닉스와 손잡고 이런 특허 장벽을 넘어 국산화에 성공했다. 긴장한 일본 업체들이 ‘가격 후려치기’로 싹을 자르려고 나섰지만 유진테크는 국내 반도체 제조업체와 인텔에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마이크론과도 협의를 진행 중이다.

반도체는 파티클과의 싸움이다. 머리카락 직경 10만분의 1 굵기로 회로를 새기는 초미세 공정에서 미세한 먼지는 제품의 성패를 좌우한다. 엄평용 유진테크 회장은 “90%의 완성도는 누구나 한다. 95% 완성도는 몇몇만 한다. 이를 다시 96%, 97%, 97.5%로 올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디테일의 차이가 모든 것의 차이”라고 말했다.


K반도체 없으면 글로벌 경제가 멈춘다

반도체 개발과 양산은 별개의 영역이다. 장비를 만들었다 해도 이를 생산 라인에 깔고 가동할 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문제들이 생긴다. 한국 반도체 장비 업체들의 강점은 이런 대규모 반도체 생산 라인을 가진 제조업체가 우리나라 기업이라는 데 있다. 양산 시 문제를 시험해보거나 바로 수정하는 게 용이하다. 반도체 제조업체와 장비업체가 서로를 파트너로 존중하고 협력해야 전체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K반도체가 주목받고 있지만 미국에 비하면 우리나라 반도체 장비의 기술력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유진테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인력 확보다. 2018년 기준 매출 1,000억원이 넘는 벤처기업 중 1인당 평균 급여(9,400만원)가 가장 높은 기업인 데도 서울과 거리가 있다 보니 박사급 우수 인력을 모시기 힘들다. 인력난의 돌파구를 만들고 해외 시장도 개척하기 위해 유진테크는 2017년 미국에서 엑시트론 반도체 장비 사업 부문을 인수했다. 지난해 70여명의 신규 인력을 뽑은 데 이어 올해도 비슷한 규모의 채용을 계획하고 있다. 전체 270여명 직원 중 70%가 연구 관련 인력이다.

엄 회장은 “앞으로는 뭘 해도 반도체”라며 “반도체 초호황은 아직 시작도 안됐다”고 말했다. 자율주행 전기차는 차인지 전자제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반도체를 많이 쓰고, 코로나19로 10년은 앞당겨진 언택트가 가속화하면서 클라우드 서버 수요도 폭증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근 구글과 유튜브가 저장 용량 문제로 먹통이 되는 사고까지 일어났다.

엄 회장은 “우리나라 반도체가 없다면 전 세계가 멈춰 서는 상황”이라며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우리나라 사람들만 평가절하하고 있는데 지금 5,0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전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는 오랜 시간 반도체 업종 종사자의 땀이 일궈낸 빛나는 성과다. 엄 회장은 "그동안 제일 똑똑한 사람들이 공대 가고 해외 나가 코피 쏟아가며 죽고 살기로 배워 만든 결과”라며 "미국이 그냥 넘겨준 게 아니라 우리가 노력해 힘들게 가져온 것이고 일본 10여개 업체와 치열하게 경쟁하며 발전시켜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도체 산업은 195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진 미국이 주도했다. 1970년대 중반부턴 일본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위협을 느낀 미국은 1986년 미일반도체협정을 맺고 일본을 압박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이 전기를 맞은 계기다. 최근 미국은 중국 반도체 굴기를 정조준했다. 중국 반도체 기업 SMIC는 미국의 첨단 반도체 장비를 쓸 수 없다. 중국의 반도체 추격이 위협이던 K반도체에겐 또 한 번의 기회가 왔다. 엄 회장은 “전 세계를 움직이는 K반도체에 전 국민이 자긍심을 충분히 가질 만하다”며 "반도체는 다음 세대도 먹고 살아야 할 우리의 미래"라고 말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협회 상무는 "반도체는 투자비가 막대하고 기술도 필요해 단기간 내 제조시설 구축이 어려운데 사실상 우리나라와 대만 업체들만 남은 상황"이라며 "차량용 반도체 등 이미 시장에선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어 전반적인 반도체 제품의 품귀 현상이 지속될 공산이 커 보인다"고 밝혔다.

안성·이천=박일근 논설위원 ikpark@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