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수 부재로 비상경영에 들어간 삼성전자가 대규모 인수합병(M&A) 가능성을 예고했다. 특히 구체적인 시점과 적지 않은 투자 비중까지 내비치면서 M&A와 관련된 물밑 작업도 이미 진행 중인 것으로 관측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투자와 고용 창출이라는 기업의 본분을 충실해야 한다"는 옥중 메시지를 낸 지 바로 이틀 뒤 나온 발표란 점에서 주목된다.
최윤호 삼성전자 경영지원실 사장(CFO)은 28일 4분기 실적 발표 직후 이어진 컨퍼런스콜에서 "삼성전자는 지난 수 년간 지속적으로 M&A 대상을 매우 신중하게 검토했다"고 밝혔다. 이어 "현재 대내외 불확실 상황으로 실행 시기를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을 토대로 이번 정책 기간 내에 의미있는 규모의 M&A를 실현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이날 올해부터 2023년까지 진행할 주주환원정책을 내놨는데, 이 기간내 M&A가 이뤄질 수 있음을 시사한 셈이다. 삼성전자가 2017년 자동차 전장회사인 하만 인수 이후, M&A에 대한 공식적인 언급은 이번 처음이다. 최 사장은 이 부회장의 복심으로 알려진 최측근 인사다.
일각에선 삼성전자의 이번 M&A 언급에 대해 이례적이란 시각도 나온다. 지난 18일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서 2년6개월 실형을 받고 이 부회장이 법정 구속된 이후, 삼성그룹 안팎에선 오너 부재로 중장기 경영 전략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발표를 계기로 이 부회장의 옥중경영은 향후 적극적인 형태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이번 M&A 발표도 현재 수감 중인 이 부회장과의 교감 속에 이뤄졌을 것이란 게 재계 안팎의 중론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6일 옥중 메시지를 통해 "제가 처한 상황과 관계없이 삼성은 가야 할 길을 계속 가야 한다"며 "투자와 고용 창출이란 기업의 본분에도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공격적인 M&A와 투자를 강행하고 나선 배경엔 역시 충분한 실탄이 존재한다. 지난해 4분기 기준 삼성전자가 갖고 있는 순현금(현금-차입금)은 104조5,000억원에 달한다. 1년 전보다 10조원가량 늘었다. M&A에 필요한 자금은 충분하단 얘기다. 이날 최 사장은 "지속적인 현금 증가는 회사 경영 측면에서도 부담이 된다"고 한 점에 미뤄 2017년 9조원을 들여 미국 전장전문 기업 하만을 인수했을 때보다 더 큰 '빅딜'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구체적인 M&A 후보군에 대해선 언급을 피했지만 최근 유망 사업으로 꼽히는 자동차 전장(전자장비) 업체가 유력한 대상으로 떠오른다. 최근 삼성전자가 전장사업팀장을 하만 인수에 깊게 관여했던 이승욱(53) 사업지원TF 부사장으로 선임한 것도 전장 분야에서의 추가 M&A 가능성을 높이는 대목이다.
차량용 반도체의 경우 향후 자동차 산업이 친환경·전기차 중심으로 재편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점쳐지는 분야다. 차량용 시스템 반도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네덜란드 NXP와 스위스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등이 삼성전자의 M&A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다.
노근창 현대차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삼성이 미래 먹거리로 전장 분야를 꼽고 있는 데다 미래 전망도 밝은 만큼 삼성 역시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