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요정. 요즘 김진숙 지도위원의 별명이다. 2020년 12월 30일, 부채요정은 예약해 놓은 항암치료를 앞두고 병원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부산을 출발한 그는 2월 7일 즈음 청와대 앞에 도착할 예정이다. 그곳에선 한진중공업 투기자본 매각에 반대하고 김진숙의 복직을 촉구하는 이들이 단식 투쟁 중이다. 세 명으로 시작한 동반자들은 이제 오십여 명으로 늘었다. 자신의 자리에서 마음을 보태는 이들까지 치자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그와 함께 매일 매일 걷고 있다. 얼마 전에는 LG트윈빌딩에서 투쟁 중인 청소노동자들도 다녀갔다. 85호 크레인의 또 다른 모습으로, 길 위에서 연대의 장이 펼쳐지고 있다.
파란 옷에 하얀 마스크를 끼고 동그란 부채를 들고 걷는 사람. 다른 이에게 ‘부채요정’이란 별명이 붙었다면, 나는 아마도 신경질을 좀 냈을 터다. 왜 또 요정이람. 투사에게도 꼭 ‘요정’이라는 여성형 꼬리표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지. 하지만 '김지도'(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약칭)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어쩐지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그의 다른 모습과 만나게 된 것 같아 즐겁다.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시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부러 그가 ‘여성 노동자’라는 사실을 지우려 했던 태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늘 좀 더 적극적으로 ‘여성 노동자 김진숙’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는 1980년대 한진중공업 유일의 여성 용접공이었다. 5년을 근무하는 동안 지각 한 번 하지 않았고, 불량 한 번 내지 않는 모범 일꾼이었다. “처자식 딸린 우리는 아무래도 처지가 곤란하니 자네가”라는 이유로 노조 대의원이 되고 보니 어용노조의 문제가 심각했다. 그에 저항하다 부당하게 해고당했다. 그 이후로 35년, 그는 복직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
2011년, 부산 영도 85호 크레인 위에서 두 주먹을 단단하게 쥔 그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여성의 신체를 한 ‘남성 노동자의 형상’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이런 얕은 편견을 산산조각 낸 것은 '소금꽃나무'(2007)였다. 그가 쓴 에세이와 편지, 연설문 등이 수록되어 있는 책 속에는 여성-노동자로서의 삶이 살아 있었고, 그 시간 속에서 그의 사유가 깊어지고, 투쟁의 의지가 단단해졌으며, 마음이 넓어져왔음을 배웠다. 그와 함께 내 머릿속 ‘여성 노동자의 형상’도 달라졌다.
그런데 '김지도' 역시 희망버스 이전에는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전 유튜브 ‘연분홍TV’를 통해 스트리밍된 “김진숙과 함께 용기를 더하는 라이브-내가 싸우듯이”에서 그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옛날에는 페미니즘적 관점이나 (그에 대해 논할) 사회적 분위기가 별로 없었던 탓에, 여성 정체성으로는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다”고 했다. 요즘엔 “여성 동지들에게 특별한 유대감이 생긴 것 같다”고 덧붙이며 웃었다.
이 방송에서 그는 소수자와의 연대를 강조하며 투쟁의 승리, 그 자체보다는 “싸우는 과정들이 하나하나 중요했다”고 말했다. “크레인 농성 때도 하루하루 일상들, 오시는 분들의 사연들, 그걸로 309일을 지낼 수 있었다.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청와대에 간다고 해도 아마도 문전박대를 당할 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기로 한 건, 가는 길마다의 사연 때문이다. (...) 노동 해방은 하루하루의 일상이 쌓아나가는 승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노동해방이란 끝내 도달하는 점 하나가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이고,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와 함께 하는 것이다. 문득 그가 만나러 가고 있는, 이 모든 과정을 다 알고 있는, 대통령에게도 묻고 싶어졌다. 당신이 생각하는 해방은 무엇이었나요? 그 ‘높은’ 자리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정치적으로 안전한 선택들만 하면서, 그래서 다른 누구는 아니더라도, 당신만이라도 해방시켰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