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도심주택공급, 공간구조와 인프라를 고려해야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 도심에 주택을 더 많이 공급해야 한다는 주장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공급 방안으로 역세권이나 공공재개발을 통해 도심주택공급을 획기적으로 늘리겠다는 정책 역시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책이 성공하려면 어디에 얼마만큼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면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각 도시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형성된 공간질서가 있고 감당할 수 있는 개발규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가볍게 여기고 주택공급 목표만을 채우고자 한다면 자칫 공간의 질서를 해치고 기반시설에 과부하를 초래해 시민을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도시의 공간질서는 물리적 구조물에 많은 영향을 받지만 결국은 시민들의 발에 의해 형성된다. 어디에 살 것인지, 어느 도로를 이용해 출근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시민 개개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도 선택 받지 못하면 빈집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슬럼화된다. 반면 별볼일 없던 골목길이 힙스트리트로 변모하기도 한다. 이러한 공간질서를 잘 파악해 주택을 짓고 상가를 여는 것이 도심 활성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도시계획가들은 공간질서를 도시공간구조(Urban Spatial Structure)라고도 부른다.
도시공간구조에서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 압축도시(Compact City)와 스프롤(Urban Sprawl)이다. 전자는 고밀로 개발된 도시를 말하는 반면, 후자는 저층저밀 주거지가 도시외곽까지 확장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밀도가 높고 주거지와 직장이 고르게 분포해 보행과 대중교통으로 일상생활이 이뤄지는 도시가 바로 압축도시다. 스프롤은 단독주택 중심으로 교외지역까지 개발해 고속도로를 이용해 장거리 통근을 해야 하는 도시다. 멕시코시티의 단독주택 중심의 스프롤과 잠실역세권의 고밀아파트 단지는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만약 잠실역세권의 인구를 단독주택으로 수용했다면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심의 고밀 복합개발은 여러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우선 도심은 지가가 높으므로 더 높은 건물을 지어 보다 많은 사람이 이용하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다. 비싼 땅에 단독주택을 지으면 한 가구가 그 땅값을 모두 지불해야 하므로 아주 부자가 아니면 살기 어렵다. 하지만 100명이 살 수 있도록 고층아파트를 지으면 땅값이 100분의 1로 줄어드니 보통사람도 살수 있는 저렴 주택이 된다. 더불어 100배 많은 사람들이 인근 직장을 걸어서 다닐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여기에 업무와 상업까지 포함한 복합공간을 만들면 금상첨화다. 걸어서 회사에 가고 장도 보고 영화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도시계획가들은 도심의 고밀 복합개발을 지지한다.
그렇다면 역세권의 고밀 주거지 개발은 항상 옳은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 세심하게 설계하지 않으면 부작용이 더 클 수 있다. 도시 중심의 업무지구 역세권과 외곽의 일반 주거지 역세권의 개발 방식은 달라야 한다. 전자는 젊은 1, 2인 가구용 고층 고밀주택이 적합한 반면, 후자는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통상 1차 역세권을 반경 500m로 보지만 환승역세권은 그 범위가 더 넓다. 서로 다른 2개 노선의 역세권이 겹치는 일명 ‘더블역세권’은 싱글역세권보다 수요가 더 많다. 그러니 역세권 개발에도 이러한 차이를 반영해 밀도와 용도 혼합을 세심하게 계획해야 한다. 예를 들면, 환승역세권이나 더블역세권은 고밀 주상복합의 형태가 적합할 수 있다. 반면 일반 주거지의 싱글역세권은 주변 환경을 감안해 중층의 주택단지가 더 적절할 수도 있다.
또한 역이 지상에 있는 경우 지하역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수도권의 지상전철역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최소 100m에서 최대 260m까지 부정적인 영향이 나타났다. 지상전철역에서 발생하는 소음과 주변 상업시설로 인한 부정적 영향이 인근 주택가격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환승역이나 민자역사일 경우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 범위가 더 넓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전철역이 지상에 있을 경우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일정거리를 이격해 주택을 공급할 필요가 있다.
서울에는 사람이 몇 명까지 살 수 있을까. 1,000만명일까 아니면 그 이상일까. 개념적으로는 도시의 정체성, 커뮤니티의 크기, 개발가능지의 규모 등 다양한 기준으로 그 도시의 최대 수용인구를 가늠해볼 수 있다. 그러나 서울과 같이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도로나 지하철, 상하수도와 같은 도시기반시설(Infrastructure) 용량이다. 법적으로나 공학적으로 도심에 고층고밀 주거지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도로나 상하수도가 부족하면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교통량이 도로용량을 초과하면 지체가 심각해지고 이를 서비스 수준 ‘F’로 평가한다. 도심의 주요 도로는 통근 시간에 혼잡한 구간이 많다. 그러므로 개발로 인해 교통상황이 어떻게 될지 따져보는 ‘교통영향평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역세권 개발의 경우 사업면적 25만㎡ 이상 사업만이 대상이므로 소규모 사업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자칫 도로교통에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사업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소규모사업이 여러 개 진행되면 영향이 누적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역세권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의 누적영향을 반드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한편 역세권 개발은 위치상 지하철을 통해 도로통행수요를 흡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청계천 복원으로 인해 청계고가가 사라졌지만 종로와 을지로의 교통상황이 크게 악화되지 않았다. 자의든 타의든 차가 막히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는 지혜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하철이라고 해서 무한정 용량이 늘어날 수는 없다. 우리나라 지하철역은 최대 10량이 정차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다. 만약 과밀개발로 지하철 승객이 최대 수송인원을 초과하게 되면 결국 ‘지옥철’이 되는 것이다.
상하수도 용량도 중요한 고려요소다. 수도권 식수원인 팔당댐의 수량이나 수질도 문제지만 결국 개발의 핵심제약요인은 상하수관로의 용량이다. 대부분 지하에 매설돼 있으므로 간선 상수관망이나 하수관의 용량을 늘리는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서울에는 여전히 집이 부족하고 많은 사람들이 먼 거리에서 직장에 다닌다. 그래서 직장이 가까운 도심이나 접근성이 좋은 역세권에 주택을 많이 공급하겠다는 정책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주택공급 목표에 매몰된 나머지 도시의 공간질서나 인프라의 용량을 간과하면 결국 시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1기 신도시로 주택시장이 안정됐지만 더 많은 시민이 더 먼 거리를 통근하며 매일 힘들어하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입지와 밀도를 신중하게 고려하지 않으면 도심의 고밀주택공급은 소음과 지옥철에 시달리는 불량 주거지를 양산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