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이 아니면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았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유년시절부터 뼈속까지 받아왔던 인종차별의 영향으로 보였다. 독기를 품고 사업 전선에 뛰어든 배경이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잉태된 저돌적인 성향 탓에 그는 종종 '제2의 스티브 잡스'로 비유됐다. 비즈니스에서도 목표가 정해지면 주저없이 인수합병(M&A) 카드를 꺼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게 40년이다. 한국계 3세 일본 기업인인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64) 소프트뱅크 회장 얘기다. 이처럼 미래 베팅을 주력해 온 손 회장이 마침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다.
닛케이 등 일본 언론은 27일 소프트뱅크가 미야카와 준이치(56) 부사장을 사장 겸 최고경영자(CEO)로 승격하는 인사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소프트뱅크측에선 이번 인사가 경영 쇄신에 따른 조치라고 설명했다. 손 회장 주도로 우버와 위워크 등에 진행된 대규모 투자 실패가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손 회장은 향후 창업자 이사직을 맡는다. 직접적인 경영에선 떠나지만 손 회장의 굴곡진 인생사는 다시 한번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1957년 8월11일 일본 사가현의 빈민가에서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난 손 회장의 가정 형편은 녹록치 않았다. 특히 어린 나이에 단지 한국인이란 이유에서 숱하게 무시 당했던 경험은 그의 인생 항로를 사업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그가 본격적인 사업 전선에 나선 때는 1981년 9월. 유학시절부터 남다른 관심을 보여온 정보기술(IT) 분야에서부터 둥지를 틀었다. 이 때 그가 2명의 사원과 1000만엔의 자본금만으로 세운 게 소프트뱅크다. 당시 그가 허름한 사무실에서 사과 궤짝에 올라서 "5년 뒤 매출 100억엔을 달성하겠다"고 공언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소프트웨어 도매와 컴퓨터(PC) 잡지 출판으로 시작한 소프트뱅크의 초라한 출발은 이렇게 시작됐다.
손 회장의 탁월한 사업 수완을 장착한 소프트뱅크는 초반부터 승승장구했다. 개인용 PC 보급과 전자오락의 대중화로 사업에 탄력을 받자, 우량 기업들을 잇따라 흡수했다. 1995년 세계 최대 PC 전시업체인 미국 컴덱스를 삼킨 데 이어 이듬해인 1996년엔 야후 재팬을 인수, 본격적인 사세 확장에 돌입했다. 이후 2001년 일본내 최초의 초고속인터넷인 ADSL 서비스를 제공했고 2013년엔 미국 스프린트까지 사들이면서 글로벌 통신사업자로서의 위상도 공고히 했다.
그는 투자에 대한 혜안도 상당했다. 2000년 중국에서 마윈 알리바바 창업자를 만나 5분 만에 2000만달러(약 221억원) 투자를 결심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알리바바는 아이디어는 혁신적이었지만 창업한 지 1년 밖에 안된 스타트업이었다. 마 창업자의 비전을 읽은 과감한 투자로 결국 알리바바는 유니콘(기업 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으로 성장했다. 손 회장은 알리바바가 2014년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될 때 일부 지분을 팔아 8억600만달러(약 8,900억원)의 수익을 거뒀다.
그렇게 상승세만 이어갈 것 같았던 손 회장에게도 위기는 찾아왔다. 손 회장이 2006년 당시 보다폰 재팬을 역대 최대 규모인 1조7,500억엔(약 18조원)에 인수하자, 사내 임원 가운데 3분의 1이 사표를 던졌고 주가도 폭락했다. 하지만 사내외의 이런 평가 속에서도 특유의 뚝심경영을 고수한 손 회장은 보다폰 재팬 인수 이후 1년 만에 영업손실을 흑자로 돌려 놓으면서 세간의 우려를 잠재웠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남달랐다. 손 회장이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브로드밴드'를 강조하자, 김 전 대통령은 즉시 'IT기본법'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고 전국에 초고속 인터넷을 구축했다. 이는 한국을 세계 IT 강국으로 도약시킨 기폭제로 작용했다. 2019년엔 문재인 대통령과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을 만나 인공지능(AI)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