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일 하고파" 퇴직 후 런웨이·스크린 누비는 멋쟁이 공무원

입력
2021.01.27 04:30
19면
시니어 모델 겸 배우 유효종씨
2019년 정년퇴직 후 시니어 모델·배우로 활약

편집자주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저는 곧 정년퇴직을 하는데요, 앞으로 시니어 모델에 도전해볼까 합니다."

유효종(62)씨는 정년퇴직을 앞둔 2018년 직원 워크숍에 참석해 '폭탄 발언'을 했다. 1983년 옛 체신부에 발을 들인 뒤, 35년 내내 점잖은 공무원 생활만 한 그가 모델이 되겠다니.

하지만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박수가 터져나왔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계장님(유씨)은 모델이 어울린다"는 칭찬도 들렸다. 유씨는 "금연을 할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녀야 결심이 굳지 않느냐"라며 "퇴직 후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일부러 지인들에게 알리고 다녔다"고 말했다.

은퇴 후 모델 아카데미로... 1년 뒤 시니어 패셔니스타 1위

유씨는 결심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2018년 7월 공무원 공로연수에 들어간지 한 달 만에 모델 아카데미 문을 두드렸다. 당시 '시니어 모델'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었고, 모델 아카데미에선 입시반, 전문가반과 함께 시니어 모델반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아카데미에 가면 똑바로 걷는 훈련, 몸을 바로 세우는 훈련을 받아요. 특히 나이 들어서도 '멋있다'라는 말을 들으려면 자세가 정말 중요합니다. 모델 일과 상관없이 자세 때문에 아카데미에 오는 이들도 있었어요." 아카데미는 자체적으로 디자이너와 협업해 그들만의 무대를 꾸몄고, 유씨도 그곳에서 런웨이 경험을 쌓았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유씨는 현대백화점 시니어 패셔니스타 선발 대회에서 1,5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해마다 패셔니스타 대회를 여는 현대백화점이 60세 이상 시니어 모델만 대상으로 주최한 첫 대회였다. 참가자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유씨는 "경험한다, 배운다는 생각으로 지원서를 냈는데 서류심사에 덜컥 붙었다"면서 "결선에선 일반인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를 진행했는데, 투표가 진행되는 열흘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여유롭고 재밌는, 자존감 채워주는 일"

유씨는 공로연수에 들어가기 직전 우연히 인터넷 사이트에서 시니어 모델이라는 단어를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전부터 시니어 모델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은퇴 후 뭐할지 미리 생각해놔라"라는 '인생 조언'을 선배들로부터 줄곧 들었지만,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질 때까지 별 생각이 없었다. "일 그만두기 6개월 전에도 뭘 해야할지 정말 막막했어요. 30, 40년 계속 일하다 보니 일단은 쉬고 싶다는 생각도 강했고요."

다만 은퇴 후 삶에 대한 확고한 기준은 있었다. 우선 여유롭고 재밌어야 할 것. 공직 생활 중 상당 기간을 대변인실에서 보냈다는 유씨는 하루하루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장관 연설문을 쓰고, 언론 인터뷰를 준비하고, 매일 아침 7시 반까지 출근해 조간 신문 스크랩도 해야 했다. 적어도 은퇴한 뒤에는 '쫓기지 않는 일'을 하고 싶었던 이유다.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일'도 유씨에게 중요한 조건이었다. "일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은퇴하면 상실감이 정말 크거든요. 하지만 시니어 모델은 마치 스타가 된 것처럼 멋진 옷을 입고, 무대 중앙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죠. 상실감은 커녕 자존감을 높일 수 있어요." "멋도 부리고 즐겁게 살고 싶었다"는 유씨에게 시니어 모델은 꼭 맞는 은퇴 후 삶이었던 셈이다.

최근에는 배우로 자리매김... 1년 반 사이 광고만 50편

하지만 국내 시니어 모델 시장은 아직 걸음마 단계인 상황. 유씨는 시야를 넓혀 2019년부터는 패션모델이 아닌 광고모델로서 더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유씨는 "TV광고도 있지만 요즘에는 페이스북 같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 광고도 많이 하지 않느냐"면서 "물론 주인공은 20, 30대지만, 주인공의 할아버지, 아버지 역할도 필요하기 때문에 나 같은 시니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 시장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그가 2019년 중반부터 지난해까지 1년 반 동안 출연한 광고는 무려 50여편. '사랑의 열매'와 같은 TV 광고에도 얼굴을 비췄고, 유튜브를 보다 보면 그가 출연하는 광고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광고모델로 일하게 되면서 '기본기는 있어야 망신은 안 당한다'는 생각에 연기 학원도 다니기 시작했다.

이왕 뛰어든 연기, 유씨는 연극 연기에도 도전했고 최근에는 영화 욕심을 내고 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단편영화 찍으면서 일반인 배우를 모집하는 글이 많아요.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 아버지 역할, 경비원 역할 등에 대한 수요가 있는데 연기를 하겠다는 제 나잇대 일반인 배우는 아직 많지 않죠. 단편영화 찍는다는 곳에 프로필 보내면 오디션 보러 오라고 답이 옵니다." 그렇게 유씨는 독립 장편영화 2편, 단편 18편 등 총 20편에 출연한 '영화배우'가 됐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행인, 단역에 머물렀지만, 최근 출연한 단편영화에선 조연, 주연도 꿰찼다. 대학생들이 만드는 단편영화에선 주인공의 '옛날 사고방식에 갖혀있는' 아버지 역할을 했고, 지난해 말에는 '월남전을 겪은 태극기 부대 할아버지' 역할도 맡았다.

청년들과 일하는 것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 크지만 간혹 체력이 부칠 때도 있다. 보통 단역으로 출연하면 하루 촬영이 끝이었는데, 주연으로 출연한 작품에선 5일 동안 숙식을 해결하며 촬영에 임하기도 했다.

유씨는 "즐겁자고 하는 일인데 솔직히 밤 10시가 넘어가면 조금은 힘들었다"면서도 "젊은이들과 일하는데 저를 신경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먹고 사는 직업은 아냐... 자존감 높여주는 일 찾길"

유씨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았다.

"은퇴 후 하루하루 먹고살기가 어려운 분들이 많을 텐데, 그런 분에게는 시니어 모델이나 배우를 추천할 생각은 없습니다. 즐겁지만, 이걸로 먹고 산다는 개념은 아직 정착되지 않았으니까요. 모델이나 배우라는 일이 일반적이지도 않고요. 대신 저처럼 본인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있는 자신만의 일을 적극적으로 찾아 실행에 옮겨 보길 응원합니다."

손영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