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차에, 백마 탄 왕자가 떠돌아 다니는 이유를 중세 유럽의 상속제와 관련해서 썼다. 왕자만이 아니었다. 장자(長子·큰아들) 상속제가 정착된 지역에서 부모는 장남만 결혼시킨 후 자신들의 노후 봉양을 조건으로 땅이나 작업장 등 생계수단을 물려주었다. 다른 아들들은 집을 떠나 각자 알아서 살아야 했다.
'장화 신은 고양이'는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가난한 방앗간 주인이 사망하자 큰 아들은 방앗간을 물려받는다. 둘째 아들은 나귀를 차지한다. 주인공인 셋째 아들은 고양이 한 마리를 받고 집을 떠난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후작이 되어 공주와 결혼한다. 이 또한 ‘백마 탄 왕자’처럼 상속에서 배제된 아들의 인생 역전 이야기다. 언젠가는 집을 떠나 거친 세상으로 나가야할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달랬다. 이렇게나 많은 모험담의 배경에는 불평등한 상속제가 있었다.
상속제는 한 가문과 집단의 생존 전략이기에 시대나 지역, 문화권에 따라 다르다. 크게 단독상속제와 균분상속제(분할상속제)로 나눌 수 있다. 균분상속제는 자손 모두에게 생존을 위한 자원을 공평하게 배분한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문제가 생긴다. 왕가의 경우, 모든 왕자들에게 영토를 1/n씩 나눠 주면 몇 대 안 가서 큰 왕국의 왕은 양촌리 이장님이 되어 영향력을 잃어버린다.
재산이 얼마 없는 집안인 경우, 아무도 늙고 병든 부모를 돌보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차피 형제 수대로 상속 받을 것이고, 1/n을 상속 받아봤자 얼마 되지도 않으니 말이다. 단독상속제는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한 자식에게 재산을 몰아주어 가문의 지위와 영향력을 유지하고 부모의 노후 봉양을 보장받는다. 장자상속제가 대표적이다.
장자상속제가 유럽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귀족 집안의 이남이는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가 되고 삼남이는 용병대장이 되곤 했다. 유럽 내에서 인생을 개척하던 장남 아닌 아들들은 인구증가에 따라 유럽 외 지역으로도 진출한다.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은 영주의 둘째 이하 아들이 대부분이었다. 신앙심 외에 스스로 영지를 마련하려 했던 참전동기가 있었다.
대항해시대가 되면 이런 흐름은 뚜렷해진다. 에스파냐 통일전쟁이 끝난 후 실업자가 된 기사들은 바다 건너 북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로 간다. 영국의 경우 해적이나 해군 지휘관으로 성공한 이들 중에는 청교도 귀족 집안의 차남 출신이 많다. 이들은 작위를 물려받지 못하자 하인을 데리고 미국 남부나 서인도 제도로 이주하여 대농장을 건설해 영주 행세를 하기도 했다. 이들의 딸과 결혼하고자 구혼 여행을 떠난 자들 때문에 백마 타고 떠돌아다니는 왕자 이야기는 계속 생겨났다.
한편 땅을 상속받지 못한 평민 아이들은 상공인이 되어 길드를 조직하고, 젠트리 계급의 차남들은 산업 혁명을 주도하여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상속에서 배제되었기에 다른 곳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이들의 역사는 유럽 세력의 팽창과 식민지 침략사업, 자본주의 발달과 제국주의와 맞물려 세계사가 된다.
단독 상속제에는 말자(末子·막내아들)상속제도 있다. 가축이 먹을 풀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유목문화권에 많다. 부모의 겔(텐트)에서 태어나 자란 아들들은 성장하면 차례로 결혼하여 독립한다. 다른 풀밭을 찾아가서 겔을 짓고 가축을 키우며 산다. 막내는 나이가 들어도 떠나지 않는다. 부모의 겔에서 살며 부모를 보살피다가 겔과 가축을 물려받는다. 부모는 사망할 때까지 재산과 권위를 유지하며 아들의 봉양을 받을 수 있고, 막둥이는 부모의 보호를 오래 받다가 안전하게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것이 말자상속제의 장점이다.
장자건 말자건 단독으로 상속받은 자에게는 부모를 봉양하고 형제들의 생계를 도울 의무가 있다. '흥부전'에서 흥부 가족을 돌보지 않은 놀부가 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주된 상속에서 배제되었다하여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선물을 받거나 보상금을 받는다. 딸인 경우 결혼할 때 받는 지참금이나 혼수의 형식으로 받는다. 유럽사에서 왕가의 결혼으로 국경이 바뀌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 때문이다. 공주가 친정 나라 영토 일부를 지참금으로 가지고 다른 왕가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원래 우리나라는 딸 아들 차별 없는 균분상속이 보편적이었다. 상속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큰아들을 우대한 시기는 얼마 안 된다. 조선 후기, 약 17세기부터였다. 원인은 인구 증가였다. 재산을 균분하면 모두 가난해지기 때문에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 이렇게 변했건만, 이에 온갖 차별의 이론이 장자상속과 여성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 꿰맞추어졌다.
큰아들은 제사를 모신다는 이유로 평소 우대를 받고 부모 사후에 상속을 받았다. 제사 자체가 그렇게나 중요하다면 아들이 없으면 딸에게라도 물려주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굳이 부계 혈족에서 양자를 들인다. 딸에게 제사를 물려주면 재산이 딸의 시가로 가기 때문이다. 결국 제사는 핑계이고 다 남성 혈족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여성은 제사를 핑계로 상속에서 배제되고 차별받게 된다. 결혼할 때에 부모가 해 주는 혼수가 공식적으로 받는 상속이었다.
장자상속 관행은 근대 상속법으로 성문화되어 이어지다가 1960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큰아들의 상속 지분을 줄이고 다른 아들과 딸, 배우자의 상속 지분을 늘리는 방향이었다. 1991년 이후 현재 상속법에 의하면 배우자는 1.5, 자녀는 1의 비율로 상속받는다.
그럼 지금은 딸·아들 차별 없는 균분상속제의 시대인가? 아니다. 자녀가 결혼하는 경우를 보자. 한국의 보통 부모라면 자녀 교육을 마치고 나면 살고 있는 집 한 채 외에 큰 재산은 없기 마련이다. 부모는 아들에게는 능력껏 집을 해 주려고 하지만 딸에게는 취직하여 저축한 돈으로 알아서 혼수를 마련해 결혼하라고 한다.
그런데 아들이 결혼할 때에 부모가 집을 해 주면, 나중에 균분상속받을 부모의 유산을 남자 형제들만 결혼할 때 미리 받아 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결혼할 때 남자 쪽에서 집을 해 가는 것은 차별이다. 부모 사후에 딸들이 받을 상속분을 줄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상속제도의 목적은 집단의 생존과 부모의 노후 봉양이다. 조선 후기 이후 단독 상속받은 장남에게는 부모를 봉양할 의무가 있었다. 마찬가지다. 지금의 부모가 아들이 결혼할 때에 집을 통해서 미리 상속해주는 이유도 봉양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를 직접적으로 돌보는 이는 아들의 배우자다. 부모님 진지상도 조상 제사상도 아들 아닌 며느리가 차린다. 부모님댁 설거지도 청소도, 부모님 말벗도 간병도 며느리가 한다. 결국 부모는 며느리의 노동력을 사는 댓가로 아들에게 집을 해 주는 셈이다. 소를 데려와서 밭 갈게 시키려면 외양간부터 지어야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결혼 기간 동안 여성은 아늑한 방에서 자고 남성은 난방 안 들어오는 베란다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 혜택은 남성도 누리는데 왜 결혼할 때 남자가 집 해 오는 것이 남성 차별이라고 외치는가? 집을 며느리 명의로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이혼할 때 시부모가 해 준 집을 여성이 가져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시 말한다. 지금의 결혼 제도에서 남성이 집 해 오는 것은 여성 차별 맞다. 남성은 배우자인 여성이 일하는 댓가로 여자형제들보다 미리, 더 많이 상속받는다.
지난 회차 칼럼에 본문 내용과 상관없이 ‘여자도 군대 가라!’ ‘결혼할 때 남자가 집 해오는 것은 남성 차별이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그래서 이번 이야기를 써 보았다만, 상속제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도야 변하는 것이다.
그보다 차별과 배제의 패턴을 알아차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장자상속제 시대를 보자. 딸은 상속에서 배제되기에 부모가 혼수를 해 주는 것인데, ‘딸 셋이면 기둥뿌리 뽑힌다’거나 ‘딸은 도둑’이라며 여성이 욕을 먹었다. 균분상속제 시대가 되었다. 여전히 아들은 딸보다 더 많은 유산을 상속받는다. 결혼할 때 부모에게서 집을 받는 방식으로. 그래도 남성 차별이라고 하며 여성이 욕 먹는다.
결국 시대와 풍습이 바뀌어도 늘 욕 먹는 집단은 여성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처지에 놓인 집단을 ‘약자’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