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부터 역대 대통령들까지 아낀 ‘명품 벼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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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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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충남 보령 남포벼루 '한진공예' ·

서재의 네 친구, 문방사우 중 벼루는 무겁고 자리를 많이 차지한다. 그러나 붓이나 먹, 종이와 달리 잘 닳지 않는 데다 예술성을 갖춘 덕분에 소장가치가 가장 높다. 세월의 흔적이 있을지언정 버려지지 않고 골동품상에서 유통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벼루는 먹을 갈 때 매끄러워 조금도 끈적거리지 않고, 묵지(墨池·묵즙이 한데 모이도록 오목하게 팬 곳)에 물을 넣어 둬 10일 이상 지나도 마르지 않는 것을 좋은 벼루로 친다.

우리나라에서 벼루의 재료가 되는 석연재(石硯材)는 전국에 걸쳐 분포한다. 그 중에서도 평양·정선·평창·단양·계룡산·남포·안동·경주·언양·장수·강진 등이 대표적인 석연재 산지로 꼽힌다. 이 중에서도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남포석이다.

보령 남포벼루는 우리나라 벼루생산 및 공급량의 70% 이상을 차지한다. 보령의 남포벼루는 조선시대부터 그 우월성을 인정받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 도중 가장 먼저 챙긴 벼루, 현재 보물 제547호로 지정된 그의 벼루 세 개 가운데 두 개가 남포벼루일 정도로 우수성과 역사성을 인정받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국무위원들에게 선물용으로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모두 한진공예의 김진한(80) 명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가 만든 벼루 두 점이 현재 청와대에 대통령 기록물로 남아 있다.


보령에서 3대째 남포벼루 제작

“말은 빨리 건너려고 물을 가로질러 가다가 휩쓸려 죽지만, 소는 물 흐르는 대로 따라가 절대 죽지 않지요. 돈과 명예 등 출세만 생각해 서두르면 잘못되는 것입니다. 힘들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좋은 돌을 찾아, 순리에 따라 정성을 더하면 좋은 벼루를 만들고, 또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이지요.”

연일 영하 20도에 육박하던 강추위가 다소 누그러진 지난 12일 오전. 충남 보령시 청라면 남포벼루 전시관에서 만난 김 명장은 벼루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으로 가득했다.

김 명장은 조산 말기 조부 김형수 옹, 부친 김갑용 선생에 이어 3대째 남포벼루 명맥을 잇고 있다. 김 명장은 1987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된 데 이어 1996년 석공예 부문 대한민국 명장이 되면서 벼루 대가로 공식 인정받았다.

3대째 이어진 남포벼루 제작은 조부 김형수 옹이 마을 서당에 학생들이 쓰는 벼루를 만들어 납품하면서 비롯됐다. 가업을 이은 부친 김갑용 선생의 벼루는 일본 천황에게까지 건너갈 정도로 유명했다.

김 명장은 일곱 살 때부터 망치와 정을 갖고 돌을 깨며 놀았다. 석재를 만지는 집안이었지만 벼루에 관심을 보인 것은 5남 1녀 중 김 명장이 유일했다. 친구들은 ‘돌쟁이 집 아들’이라고 놀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다 자신에게 남다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평생 업으로 삼게 됐다. “중학교 2학년 때쯤 어느 날, 아버지가 다 만드신 벼루에 손을 댔어요. 살짝 변화를 준 거였는데, 혼이 나겠다 싶어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걸 보고 ‘손재주가 제법 있다. 아주 잘 만들었다’ 하시는 거예요."

벼루의 길에 본격 뛰어든 그는 최고의 돌을 찾은 뒤 손재주와 상상력을 더해 다양한 문양의 남포벼루를 만들었다.

그가 만든 벼루를 받아갔거나 주문한 사람은 12일 현재 5,791명에 달한다. 그는 새로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그 사람의 인적사항은 물론 작품의 이름과 특징, 방명록, 재질, 보증서, 일련변호까지 꼼꼼히 남겨 둔다. 그는 “내가 만든 작품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한 것도 있지만, 한때 내 작품이라고 속인 벼루가 시장에 나오기도 해 논란이 됐다"며 "제작단계서부터 확실히 해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긴다”고 말했다.

그는 7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결같이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대에 선다. 그가 만든 벼루 하나하나가 그의 혼과 정성이 들어가 있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다. “좋은 글씨는 좋은 벼루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어요. 글을 쓰는 분들이 그 전에 먹을 갈면서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것이 벼루인데 대충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 벼루가 얼마나 좋은지는 써 본 사람만이 안다고 한다. 열 번 넘게 그를 찾아와 벼루를 받아간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는 벼루가 고가인 탓에 구입을 망설이는 사람에겐 일단 써 본 뒤 마음에 들면 구입하라고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주변에서 '그러다 돈을 떼이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지만, 지금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남포벼루의 진수 ‘백운상석’

벼루 하나를 만드는 데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몇 달이 걸린다. 돌을 자르고 다듬은 뒤 용, 봉황, 거북, 학, 사군자, 십장생 등 다양한 문양과 글씨를 새기는 일은 모두 그의 손으로 이뤄진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양이 들어간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은 그렇게 탄생한다.

다양한 벼루지만 재료는 오직 하나, 백운상석이다. 그 이상 가는 돌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만큼 단단한 돌이란 이야기다. 추사 김정희가 열 개의 벼루에 구멍을 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대해 그는 "그게 사실이라면, 좋지 못한 벼루를 썼기 때문"이란다. “벼루의 돌이 그만큼 물렀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진짜 좋은 돌로 벼루를 만들었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추사 김정희가 당대 최고 명필이 되기까지 쏟은 노력을 설명하는 일화이겠지만 백운상석으로 만든 벼루라면 절대 구멍이 날 리 없다는 이야기.

백운상석은 '흰 구름이 돌 위에 떠 있는 모양'이라는 뜻이다. 웬만해선 깨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데다 밀도가 높아 물도 잘 스며들지 않는다. 그는 “자르고 다듬기도 힘들지만 일단 한 번 만들어놓으면 대를 이어 쓸 수 있을 만큼 견고하고, 쓸수록 윤이 나서 갈수록 품격이 좋아진다”고 말했다.


그는 “남포벼루의 재료로 쓰는 돌을 오석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며 “오석이 까맣기는 하나 모래가 뭉쳐 이뤄진 돌이라서 벼루 재료로 쓸 수 없다. 비석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보령 성주산 일대는 백운상석의 맥이 흐르는 수상암 지대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와 백운사 뒤편에서 주지 스님의 허락을 받아 돌을 캐다 썼다. 하지만 사찰에서 석재 채취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보니 더 이상 돌을 구할 수 없게 됐다. 결국 그는 백운상석을 찾아 성주산 골짜기를 십수 년간 돌아다니다 웅천 평리에서 백운상석의 맥을 찾아내 소유주에게 돈을 주고 돌을 캐내 사용하고 있다.

그는 “돌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돼 앞이 캄캄했는데 백운상석 맥을 찾은 순간 보물을 찾은 것처럼, 온몸에 흐르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백운상석이라고 해서 모두 벼루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돌 외부는 물론, 안에 실금이 있으면 절대 쓰지 않는다. 그는 “백운상석을 망치로 두드려보면 쇠처럼 맑고 청아한 소리가 나야 한다. 둔탁한 소리가 나면 안에 균열이 있다는 뜻”이라며 “실제 벼루로 쓸 수 있는 것은 전체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좋아하는 일 하는 나는 행복한 사람

“좋아하는 일을 찾았고, 또 평생 그 일을 할 수 있어서 정말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백운상석을 캐 와 벼루를 만들 때의 그 기쁨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은 장비가 좋아져 좀 더 수월하게 돈을 벌고 또 실컷 만들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순 없다.”


그는 다섯 형제 중 유일하게 한국에 살고 있다.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해외에서 산다. 형제들로부터 40여년 전 이민 초청을 받았지만, 남포벼루와 조부 때부터 터를 잡은 고향을 떠날 수는 없었다.

두 손 두툼하게 자리 잡은 굳은살, 손등과 손마디, 손바닥까지 곳곳이 갈라졌지만, 그는 지금도 돌을 잘라내 조각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는 ‘돈’만 좇는 일부 벼루 제조업체에 쓴 소리도 했다. “처음엔 중국에서 질 떨어지는 돌을 수입해 벼루를 만들더니 언제부터 아예 중국에서 값싸게 만든 걸 수입하고, 사용해선 안 되는 돌로 만든 벼루를 만들어 파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그에게 남은 가장 큰 과제는 중국산에 밀려 남포벼루가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것. “아들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고된 일을 해낼 수가 없다”는 그는 “현재 6명의 전수생이 있다. 남포벼루에 대한 모든 것을 전수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6년 남포벼루 이수자, 전수생 작가회를 조직한 것도 같은 목적에서다. 보령 남포벼루의 명맥을 잇고, 꽃 피운 김 명장은 오늘도 백운상석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보령=글·사진 최두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