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으로 무대를 만들고, ‘줌’이 무대에 오른다

입력
2021.01.22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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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무대 신풍경

편집자주

이단비 드라마투르그(연출가와 공연 작품의 해석 및 각색을 하는 사람)가 한국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합니다. 뮤지컬과 연극 등 기획부터 대본, 통변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실무경험을 토대로 무대 안팎의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공연 예술은 사람과 사람의 대면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코로나19 탓에 최근엔 만남 자체가 불가능한 실정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흐름이 공연계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을 공연 창작에 활용하는 것이다.

지난해 10월 국립오페라단의 '피델리오'가 무대에 올라갔다. 드라마투르그(연출가와 공연 작품의 해석 및 각색을 하는 사람)로 일하며 지켜본 '피델리오'의 연습 과정은 코로나19 이전과 달랐다. 국내 방역수칙에 따라 외국인 예술가는 국내 입국 시 2주간 자가격리를 해야한다. 해외 교류 작품의 경우 원래 일정보다 2주간 시간을 더해 일정을 짜야 한다는 의미다. 예산, 시간 면에서 상당한 제약이 된다. '피델리오'의 지휘자 세바스티안 랑 레싱 역시 서울의 한 호텔에서 2주간 격리를 거쳤다.

이때 지휘자는 자가격리를 하면서도 '줌'을 통해 연습에 참여했다. 연출가의 장면 연습이 진행되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 이를 줌으로 지켜본 지휘자는 호텔 방에서 성악가들에게 음악적 지시사항을 전달했다. 성악가들은 즉석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부르고, 지휘자의 의견을 수용해 연습을 진행했다. '비대면 연습'이라는 신풍경이 연습실로 틈입한 것이다.



비대면 방식이 연극의 형식에 적극 반영된 경우도 있었다. '보더라인'이라는 연극이다. 저널리스트 겸 작가 위르겐 베르거가 독일, 한국 등에서 자료 조사를 하며 만난 사람들과의 인터뷰에서 출발한 작품으로, 다양한 '경계'를 주제로 하고 있다. 한국 독일 아티스트들과 2년간의 워크숍을 통해 제작됐다. 극에는 한국 배우 4명(나경민, 배소현, 우범진, 장성익)과 독일 배우(플로리안 야르) 1명이 출연한다.

이 공연의 난관은 언어적 장벽보다, 코로나로 만남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여기서도 '줌'은 연습과정에서 주요 소통 수단이이었다. 한국-독일 배우들 사이에서 '줌'을 통해 오간 '대화'는 공연의 주요 주제로 발전했다. 자가격리 또한 경계의 적절한 소재가 된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강제 격리가 되는 상황을 경험한 독일 배우는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질문을 공연에 녹여냈다.

한국 공연에 앞서 지난해 10월 3일 독일 뮌헨의 레지덴츠 테아터에서 '보더라인'이 초연됐다. 독일 배우는 직접 무대에 올라 관객들과 한 공간에 존재했지만, 한국 배우들은 실시간으로 송출되는 스크린 영상을 통해서 무대에 올랐다. 대면과 비대면, 온라인과 오프라인 사이 그 어딘가에 존재하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코로나 시대는 희미해졌다고 여겨졌던 국가 간 경계가 오히려 더 공고하게 가시화됐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런 점에서 '보더라인'은 '경계'라는 가장 시의성 짙은 화두를 던졌다. 공연예술은 끊임없이 그 경계를 넘어서서 만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을 고민하고 있다.

최근 국립극단에서도 한 오디션이 '줌'으로 이뤄졌다. 독일에 거주하는 박본 작·연출의 올해 공연을 위해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자리였다. 독일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약 8,400㎞의 거리를 영상 스크린으로 좁혀가며 연출과 배우들은 서로를 알아가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줌이라는 매체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로 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한계도 분명 존재한다. 공연 무대는 뜨거운 곳이다. 쉽사리 차가운 속성의 매체와 결합되기 쉽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결국 만남을 필요로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채워나갈지가 공연계의 숙제로 남아 있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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