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한수씨는 동생 정모(56)씨의 안타까운 상황을 언급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수씨가 사고 발생 두 달이 지나서야 동생의 피해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해 8월 초 동생이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사실을 듣고 한달음에 도착한 한수씨의 눈 앞에는 평소에 알던 동생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지병으로 몸이 쇠약한 동생이었지만 말까지 횡설수설하지는 않았다.
그제서야 한수씨는 동생이 유치원 원장에게 욕설과 수차례 폭행을 당한 것을 알게 됐다. 한수씨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원체 착한 놈이라 남에게 피해주기 싫은 마음에 자신이 당한 일을 가슴 속에만 꾹꾹 눌러 담아왔던 것 같다. 동생이 산재승인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면 조금이라도 억울함이 풀릴 텐데 혼수상태라 들을 수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최근 주차위반 차량에 딱지를 붙였다는 이유로 입주민에게 폭언ㆍ폭행을 당했던 경비노동자의 정신적 피해가 처음으로 산업재해 인정을 받으면서, 입주민 갑질에 신음하는 경비노동자의 권리구제 범위가 확대될 전망이다. 하지만 정작 갑질 산재승인을 처음으로 받아낸 경비노동자는 갑질 판정이 나오기 2주 전부터 사경을 헤매고 있다.
경기 군포의 아파트 경비노동자였던 정씨는 지난해 6월 5일 오후 6시 10분쯤 입주민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과 폭행을 당했다. 입주민 차량에 주차위반 딱지를 붙인 게 정씨의 '죄'가 돼버렸다. 정씨는 폐쇄회로(CC)TV를 통해 1시간 넘게 1차선에 불법 주차한 입주민 차량을 발견한 뒤 차량 통행을 방해한 것을 보고 업무지침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주차위반 딱지를 본 입주민은 정씨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말할 건덕지도 없다. 이 XX 네 주인이 누구냐”고 성을 내면서 정씨의 어깨를 수 차례 가격했다.
5분 동안 이어진 폭언과 폭행은 정씨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남겼다. 입주민들에 따르면 갑질을 당한 정씨는 이후 아파트에 올 때마다 ‘머리가 어지럽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다’는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정씨는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고 아파트로 출근했다. 이유는 단 하나, 재계약을 위해서였다. 입주민 이모(87)씨는 “정씨가 이발소를 운영하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장사를 접고 지난해 5월부터 경비원으로 취업했다”며 “7월까지만 근무하면 1년 재계약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참고 도 참으면서 일터에 나왔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의지만 갖고 이겨내기엔 갑질 충격은 너무나 컸다. 결국 정씨는 정상적인 업무수행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정도로 불면증과 우울증이 생겨 지난해 6월 말 사직서를 제출했다.
일터를 떠났지만 끝이 아니었다. 일터에서 겪은 충격과 공포는 여전히 정씨를 지배했다. 정씨가 지난해 9월 경기도노동권익센터의 마을노무사 도움을 받아 근로복지공단 안양지사에 산업재해 신청을 한 이유도 자신의 일상을 지킬 수 없어서다. 정씨는 지난해 7월 6일부터 9월 1일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정씨의 진료기록에는 ‘외상성 신경증’ ‘비기질성 불면증’ ‘정신적 쇼크’ 등의 진단기록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평소 앓던 지병이 정신적 스트레스로 악화되면서 대학병원으로 이송돼 한 달 동안 입원치료를 받기도 했다.
정씨가 지난 13일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외상성 신경증’으로 산재승인을 받은 데에는 지난해 10월 31일 이뤄진 심리학적 평가 보고서가 결정적이었다. 보고서에는 지능검사(K-WAIS), 사회성숙도 검사(Social Maturity Scale), 벤더케슈탈트 검사(BGT) 등 환자의 인지ㆍ성격ㆍ정서 상태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한국일보가 입수한 정씨 보고서에는 ‘주의 집중력이 환자의 다른 능력들에 비해 유의미하게 저하돼 있다’라며 ‘이는 환자의 불안정한 정서 상태로 인해 외부 자극에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적혀 있다. 또 ‘아파트 경비 근무 중 모욕적 언행을 받아 강한 억울함과 모욕감을 느낀다’면서 ‘만성피로, 수면장애 등의 증상이 악화될 가능성이 있어 지속적인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경기도 노동권익센터 측은 “보고서 내용이 기존 정신과 진단서보다 더욱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자료로 판단돼, 산재승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정씨가 일했던 아파트 입주민과 경기도 노동권익센터, 마을노무사 등의 도움으로 정씨는 갑질 피해에 따른 경비노동자 첫 산재 인정의 발자취를 남겼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씨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다. 한수씨는 “지난 9월 한 달간 입원치료를 마친 동생이 심신이 온전치 않은 것 같아 노모가 계시는 전남 고흥에서 요양하라고 보냈는데, 일을 하고 싶다며 기어이 용인으로 올라왔다”며 “결국 올해 초 지병이 도져 집에서 의식불명으로 쓰러졌고 20일 넘게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수씨는 “동생의 지병이 급속도로 악화된 시점이 입주민의 갑질 사건 이후라 법정에서 책임을 물고 싶다”고 덧붙였다.
수원고법은 최근 정씨의 심리학적 평가보고서를 바탕으로, 지난 7월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이 났던 입주민 폭행치상 혐의에 대한 정씨 측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갑질 입주민은 형사재판을 받게 됐다.
지난해 5월 서울 강북구 아파트 경비원 최희석씨 사망 이후 입주민 갑질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정씨를 포함한 수많은 경비노동자가 폭언·폭행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1일에도 경기 김포 아파트에서 중국 국적 입주민 A(35)씨가 미등록된 지인 차량의 출입을 막았다는 이유로 경비원 2명을 마구 때린 혐의로 이날 구속됐다.
한국일보가 최희석씨 사망 이후인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서울경찰청과 국민권익위원회, 서울노동권익센터를 통해 제출 받은 경비노동자 갑질 피해 신고를 집계한 결과 신고건수는 모두 172건에 달했다. 신고 내용 중엔 △입주민이 먹은 배달음식 그릇을 치우라고 명령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의 세차 지시 및 사역행위 강요 △술에 취해 새벽 경비초소에서 폭언한 사건 등도 있었다. 남우근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정책위원은 "경비노동자는 피해를 호소할 곳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피해자를 직접 찾아가 목소리를 듣는 등 실질적 해결방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