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수저 신화' 김동연, 여야 러브콜 왜 마다할까

입력
2021.01.23 20:00
서울시장 불출마하며 정치 행보 여지 남겨
독보적 캐릭터로 선거 때마다 여야 러브콜 받아 
"새로운 판 짜야"…홀로 차기 대권에 뛰어들까

김동연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선거에 나오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히며 그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설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그가 낸 입장문을 들여다보면 곳곳에 의미심장한 표현이 담겨 있는데요. 18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이번 선거 출마설에 대한 입장문을 보시죠.

김동연 전 부총리 보궐선거 불출마 입장문 내용 중
"정치 입문을 권유받을 때마다 정치가 제 신념을 실천에 옮기는 최선의 방법인지 늘 고민했습니다." "우리 정치가 언제까지 이기기 위한 경쟁에 매몰되어 싸워야 하는지." "국민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정책 경쟁의 장, 그리고 진영논리를 깨는 상상력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이제는 우리 정치에 이기기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새로운 판을 짜는 '경장(更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비전을 제시하고 뛰어난 우리 국민의 역량을 모을 리더십을 만들어야 합니다." "앞으로도 '사회변화의 기여'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나겠습니다."

단순히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나오지 않겠습니다'가 아닙니다. 서울시장 불출마가 자신이 전할 메시지였다면 이 얘기만 하면 되는데 설명이 길죠. 정치권에서 내는 불출마 입장문 문법에도 많이 비켜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란 무엇인지, 이 시대에 필요한 정치적 역량은 무엇인지 구체적인 자신의 철학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많은 정치 전문가는 이에 대해 "김 전 부총리가 앞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2022년 3월 차기 대선 출마를 고민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이죠.

김 전 부총리는 입장문을 내며 'DY'란 영문 이니셜을 박았는데요. 물론 그는 부총리 시절부터 페이스북에 글을 쓸 때마다 마무리에는 늘 DY를 썼습니다. 하지만 정치를 하겠다고 여운을 남긴 그가 유력 정치인이 쓰는 영문 이니셜을 쓴다는 게 독특합니다. 최창렬 용인대 정치학과 교수 역시 "그냥 가볍게 볼 부분은 아닌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20년간 국정운영 밑그림에 참여한 김동연

아직 실전 정치 무대에 선 적 없는 김 전 부총리가 대뜸 정치, 더 나아가 차기 대선을 고민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건 여야를 가리지 않고 그에게 보내는 러브콜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김 전 부총리는 선거 때마다 정당과 진영을 가리지 않고 출마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왔는데요. 지난해 21대 총선 때 김 전 부총리의 출마설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선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김 전 부총리가 충청도나 세종시에 출마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야당인 국민의힘의 공천권을 행사했던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대놓고 "김 전 부총리에게 입당을 타진했지만 그가 고사했다"고 말했었죠.

이는 김 전 부총리가 여와 야, 진보와 보수 어느 쪽 사람인지 확실하게 밝히지 않는 경계선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의 독특한 이력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관료 출신이기에 가능했지만,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며 네 번이나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한 큰 그림을 짰던 인물입니다.

김 전 부총리는 문재인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의 방향타를 잡은 사람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초대 경제부총리를 맡았던 것은 물론 박근혜 정부에선 첫 번째 국무조정실장을 맡아 국정을 조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명박·노무현 정부에서도 국정의 기틀을 잡았는데요. 이명박 정부에선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으로 참여했고 청와대 경제수석실 비서관으로 근무했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노무현 정부에선 기획예산처 산업재정기획단장과 재정정책기획관 등을 역임하며 정부 중장기 정책인 '비전 2030'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탄탄한 감동 스토리 가진 '흙수저 신화'

여야가 서로 김 전 부총리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진보와 보수 어디에도 걸칠 수 있다는 점 때문만 일까요. 그의 독특한 캐릭터가 큰 몫을 차지한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입니다.

김 전 부총리는 흙수저 출신으로, 2007년 화제의 키워드였던 '88만원 세대'는 물론 2010년대 '수저 계급론'을 논했던 젊은층을 끌어 안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아주대 총장도 지냈습니다.

동시에 성공 신화 스토리를 만들어 낸 그의 성장 배경은 중장년층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매력을 갖고 있죠. 김 전 부총리는 열한 살 때 부친을 여의고 청계천 무허가 판자촌에서 살았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탓에 빨리 돈을 벌기 위해 덕수상고에 진학했죠.

상고를 나온 뒤 한국신탁은행에 입사해 야간대학인 국제대(현 서경대)에 다니며 입법고시와 행정고시를 동시에 합격했습니다. 흙수저·고졸 신화를 쓴 입지전적 인물로 유명했죠.

김 전 부총리는 충북 음성 출신으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과 동향입니다. 반 전 총리 이후 맥이 끊긴 충청 대망론을 이을 수 있다는 희망도 있죠. 지난 총선 때 여야를 막론하고 충청권에서 출마해 정치를 하라는 요구를 받은 이유이기도 하죠.

경제통, 김동연의 또 다른 장점

①가난을 딛고 이겨낸 성공 스토리, ②진보와 보수, 중도까지 끌어안을 수 있는 정치적 포지션, ③충청이란 지역적 특색까지 대선 주자급 이력을 연상하게 합니다.

정치 전문가들은 김 전 부총리의 이런 세 가지 특징은 대중이 정치인에게 바라는 매력적인 요소라고 입을 모읍니다.

이상일 케이스탯컨설팅 대표는 "연고가 충북이고 보수 정권에서 청와대에 발탁된 점, 진보 정권에선 기재부 장관을 지냈고 대학 총장 출신으로 젊은 세대와 소통을 했던 점이 유권자에겐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라며 "김 전 부총리가 정치할 뜻이 없었다면 정치권이 숱하게 김 전 부총리에게 러브콜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설명했습니다.

'경제통'이란 점도 김 전 부총리의 큰 무기입니다. 윤희웅 오피니언라이브 센터장은 "김 전 부총리는 경제 전문성을 가진 인물이란 점에서 희소성이 있다"며 "모든 정치인이 경제를 잘 다룰 수 있다고 어필하지만 실제 그 전문성을 보유한 인사는 드물다"고 말했습니다.

이 대표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차기 대선 국면에선 경제 문제가 중심 축이 될 수밖에 없다"며 "경제 정책을 지휘해 본 건 김 전 부총리의 강점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文정부 경제 정책에 반기 든 유일한 인사

김 전 부총리가 정치권에 뛰어든다는 점을 전제로 할 경우 중도에서 자신의 외연을 넓힐 수 있는 건 그가 가진 장점으로 보입니다. 여권 내 유력 대선 주자로 불리는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갖지 못한 김 전 부총리의 무기라고 볼 수 있죠.

전문가들은 김 전 부총리가 문재인 정부를 줄곧 비판해 온 야권 지지층은 물론 현 정부실책에 실망한 중도층을 모두 포섭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권력이 어느 때보다 센 정권 초기 청와대에 각을 세웠던 점, 현 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인사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김 전 부총리는 경제부총리 시절 '김&장' 중 하나로 불렸는데요. 김은 김 전 부총리, 장은 당시 청와대 정책실장이었던 장하성 주중 대사를 뜻합니다.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을 두고 두 사람이 사사건건 부딪히며 청와대-기재부 갈등설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습니다. 김 전 부총리가 당시 얼마나 세게 청와대에 반기를 들었는지 살펴 볼까요.

김동연 전 부총리의 정부 경제 정책 비판 발언들
"경험이나 직관으로 봐서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과 임금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2018년 5월 16일 국회 예산결산위원회의에서 최저임금 인상 속도 조절론을 강조하며) "일부 연령층의 고용 부진에는 최저임금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2018년 7월 12일 경제현안 기자간담회에서 최저임금 인상 부작용을 처음으로 인정하며) "의도하지 않은 논란이 야기된 것은 유감이다. 국민이 바라는 혁신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18년 8월 3일 삼성전자 방문을 비판한 청와대를 향해) "경제 위기란 말은 동의하지 않지만 어떻게 보면 정치적 의사 결정의 위기인지도 모르겠다." (2018년 11월 7일 국회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다. 고통 분담을 요구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펼 수 있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2018년 12월 10일 이임사에서 )

최 교수는 "김 전 부총리는 여당, 야당 관계 없이 기득권에 치우치지 않고 소신 있는 발언을 많이 해 왔다"며 "이재명 지사가 최근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우위를 차지하자 정부와 대통령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에 각을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지지율이 급상승한 것과 같은 이유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검찰 개혁을 두고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대립하며 정부에 반기를 들자 야권 지지층과 중도층이 윤 총장을 지지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과거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여당 원내대표를 지냈을 때 유 전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배신의 정치'란 낙인이 찍혔는데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 전 의원은 이 때문에 단숨에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있었습니다.

김 전 부총리가 현 정부에 날을 세우면서 자신의 신념을 끌고 가는 모습을 보였기에 기존 대선 주자들과 차별화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윤 총장이 갖지 못한 행정력과 간접적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한 경험 역시 김 전 부총리의 장점이죠.


김동연의 정계 진출, 세력화 여부가 관건

하지만 관료 출신이란 한계는 김 전 부총리가 넘어야 할 산입니다. 과거 고건 전 국무총리와 반기문 전 총장이 대권에 뛰어들었다가 쓴맛을 봤죠. 정치권의 혹독한 검증 관문을 넘지 못했습니다.

관료 출신은 행정력을 갖췄다는 게 장점이지만, 대중에게 자신의 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소통 능력은 아무래도 정치인보다 떨어지기 마련이죠. 게다가 온갖 비방과 설전이 오가는 대선 무대는 엄청난 맷집을 요구하는데, 약한 맷집은 관료 출신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김 전 부총리는 고 전 총리와 반 전 총장과는 다를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최 교수는 "고 전 총리는 지지율이 오른 뒤 정부에 반기를 들었고, 반 전 총장도 '유엔 사무총장' 타이틀로 지지율이 오르자 정치적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다"며 "두 분은 대권 주자에 이름이 거론되기 전에는 소신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김 전 부총리는 부총리 재임 시절부터 신념을 굽히지 않은 모습이 유권자들에게 각인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탄탄한 스토리와 다른 주자들이 갖지 못한 확실한 차별화를 가진 김 전 부총리는 정치권에서도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을까요. 전문가들은 김 전 부총리가 세력화를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보여주는 게 관건이라고 지적합니다.

최 교수는 "반 전 총장은 중도도 보수도 아닌 모호한 발언을 계속해 국민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며 "선거 국면이 전개될수록 정치적 포지션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줄 수 있는 세력이 얼마나 되느냐가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 간 진영 싸움이 팽팽한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김 전 부총리가 빈틈을 노리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도 나옵니다.

윤 센터장은 "대선 때마다 제3지대 수요는 늘 존재했지만, 문재인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이 붙었던 2012년 대선 때는 확고한 진영 대결이었다"며 "진보의 정권 유지와 보수의 정부 심판이 강하게 형성된 상황이라 기존 세력과 진영은 계속 뭉치려고 해 제3지대가 제압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김 전 부총리가 실제 정치판에 뛰어들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부총리에서 물러난 뒤 여러 행보를 보였지만, 유독 정치권과는 거리를 두며 현안에 대해서도 말을 아껴왔기에 어떤 정치적 포지션을 취할지 궁금증이 커집니다.

김 전 부총리가 2018년 12월 10일 세종시를 떠나면서 기자들에게 남긴 말이 있습니다.

그는 '야당과 손을 잡는 것 아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저는 문재인 정부의 초대 부총리였다"고 짧게 답했는데요. 초대 부총리였던 만큼 문재인 정부의 철학을 이을지, 반대로 확실하게 거리를 둘지 그의 다음 행보가 주목됩니다.

류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