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증거를 무력화한 이들

입력
2021.01.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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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일란성 쌍둥이 범죄


2009년 1월 25일 새벽, 유럽 최대 백화점 중 한 곳인 독일 베를린 카우프하우스 데스 베스텐스(Kaufhaus des Westens) 귀금속 매장에 3인조 절도단이 침입, 보석 등 650만달러 어치를 털어갔다. 감시카메라에 찍힌 일당은 모두 복면을 했고, 천장 채광창을 뚫고 로프로 하강해 동작탐지기 등 보안시스템을 무력화했다.

다행히 경찰은 현장 인근에서 버려진 고무장갑 한 짝을 발견, 땀 흔적으로 DNA를 확인했다. 범죄자 데이터베이스 대조 결과 절도 사기 전과자인 27세 일란성 쌍둥이 하산(Hassan)과 압바스(Abbas) 형제를 찾아냈다. 유죄 판결이 나기 전까지 풀 네임을 공개하지 않는 독일 형법에 따라 그들의 성은 공개되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공개되지 않았다. 둘의 DNA 정보가 복제한 것처럼 똑같아서 유전자 증거로는 범인을 특정할 수 없어서였다. 다른 증거는 물론이고 제3의 범인에 대한 어떤 물증도 없었다. 도난 물품도 나타나지 않았다.

형제는 범행 사실을 부인했다. 유전자 증거로 둘 가운데 최소 한 명은 범행에 가담했다는 추론이 가능했지만, 누군지 알 수 없어 기소가 불가능했다. 변호사는 "묵비권이 유죄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헌법적 권리를 활용한 것일 뿐이다.(...) 또 제3의 누군가가 그들 중 한 명이 썼던 장갑을 범행 현장에 버려두고 갔다는 가설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0년의 절도 공소시효는 2019년 끝났고, 범인은 끝내 체포되지 않았다.

유전자 분석 기법의 발전으로 근년에는 유전자 염기서열 변이까지 식별할 수 있게 됐지만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주요 범죄에만 드물게 활용된다고 한다. 일란성 쌍둥이가 연루된 범죄는 그래서 지금도 수사 당국의 악몽이다. 2016년 난폭운전으로 기소된 한 영국인 일란성 쌍둥이도 감시카메라와 차량 DNA 조사만으로는 둘 중 누군지 식별되지 않아 풀려난 일이 있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