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팬픽서 시작된 '알페스', 성적대상화로 처벌해야하나

입력
2021.01.16 10:00
1990년대 유행한 '팬픽'에서 파생된 알페스 논란 
남자아이돌 사이의 동성애 코드 더 노골화 돼 
'알페스는 제2 N번방 사건' VS '본질 흐리는 비유'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글로 아이돌 팬덤 문화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자 아이돌과 여자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 한다는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와 '딥페이크(deep fake)' 문제가 연이어 청원글에 등장해서다.

먼저 11일 '미성년 남자 아이돌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알페스 이용자들을 강력히 처벌해주세요'라는 글이 올라왔다.

청원글에는 "알페스란 남자 아이돌을 동성애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차마 입에 담기도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변태스러운 성 관계나 강간을 묘사하는 성 범죄 문화"라며 "이미 수많은 남자 연예인이 이러한 알페스 문화를 통해 성적 대상화가 되고 있다"고 적혀있다.

그러면서 "소비권력을 통해 피해자들의 약점을 쥐고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태도는 'N번방' 같은 수많은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들의 태도를 떠오르게 한다"고도 썼다. 15일 오후 현재 이 청원글은 20만명 넘게 동의했다.

그러자 13일에는 '여성 연예인들을 고통받게 하는 불법 영상 '딥페이크'를 강력히 처벌해주세요'라는 청원글도 올라왔다. 딥페이크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가짜 영상을 만드는 기술로, 특히 성인 비디오에 등장하는 여성의 얼굴을 국내 여자 아이돌 등 연예인들의 얼굴로 바꾸는 행위다.

청원글에는 "딥페이크는 엄연한 성폭력"이라며 "여성 연예인들이 성적 범죄 행위의 피해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법으로 해당 딥페이크 영상이 판매되기도 한다"고 적혀 있다. 또 "이런 영상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포돼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있으며, 성희롱, 능욕 등 악성 댓글로 고통받고 있다"고 언급돼 있다. 이글은 15일 현재 36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았다.

딥페이크 관련 법안은 지난해 3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딥페이크 처벌법(성폭력범죄처벌 특례법 개정안)'에 따라 딥페이크 음란물 제작 및 유포할 경우 5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팬픽, 알페스가 뭐길래

1990년대 후반 국내에 아이돌 그룹이 등장하면서 여학생들 사이에서 이른바 '팬픽(FanFic)'이 유행했다. 팬픽은 팬(Fan)과 픽션(Fiction)의 합성어로,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아이돌 그룹을 주인공으로 설정해 쓴 소설을 말한다. 1996년 데뷔한 아이돌그룹 H.O.T를 대상으로 하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간 팬덤 문화 중 하나다.

2012년에 방영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선 이 팬픽 현상이 그려지기도 했다. H.O.T를 좋아하던 여주인공 성시원(정은지)이 교실에서 자신이 쓴 팬픽을 돌려보다 선생님에게 들키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당시 선생님은 팬픽을 빼앗아 큰 소리로 읽어준다. 내용은 이렇다.

"우혁은 거칠게 문 틈 사이로 승호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승호의 입술을 향해 돌진했다. 승호의 하얀 입술이 빨갛게 부어 올랐다. 이러지마. 너에겐 칠현이가 있잖아. 넌 이제 나의 노예다."

PC통신 시절 이러한 내용의 팬픽은 유행이었다. 재미있게 쓰여진 팬픽은 화제가 됐고,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정기적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응답하라 1997'의 시원도 H.O.T의 온라인 팬 동호회에서 팬픽 작가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드라마가 히트를 치자 같은 해 tvN 'SNL코리아'에선 팬픽의 주인공이었던 H.O.T의 장우혁과 토니가 출연해 이 장면을 패러디했다. 두 사람은 '톤혁 커플'로 등장해 "붉은 입술과 한 손에 잡히는 손목. 연신 활처럼 휘어지는 허리를 가졌구나", "이제 넌 나의 노예야" 등의 대사를 읊는다.

해당 연예인도 코믹한 요소로 받아들이며 재현했을 만큼 팬픽은 심각한 팬덤 문화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돌 멤버들을 주인공으로 쓰인 팬픽은 가수와 팬들 사이에 즐기는 놀이 문화로 소비된 경향이 컸다. 초기 팬픽은 남성 아이돌 간 동성애 등을 소재로 했지만 직접적 성적 묘사 등은 거의 담기지 않았다.


힙합계에서 시작한 알페스 논란


시간이 흘러 팬픽에서 파생된 알페스는 좀 더 노골화된 동성애 코드로 논란이 되고 있다. 수위 높은 성 행위 묘사 등이 문제가 되면서 "남자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하고 있다"는 비난이 따라왔다.

최근 남성 래퍼 손심바로 인해 알페스 문제가 수면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실존 인물을 대상으로 변태적 성관계를 하는 소설과 그림을 판매하고 집단적으로 은폐하며 심지어 옹호하기 바쁜 사람들이 있다고?"라며 알페스를 공론화했다. 래퍼 쿤디판다, 비와이, 이로한 등도 뜻을 함께 했다.

하지만 여성 래퍼 키디비는 이들의 주장에 일침을 놓기도 했다. 그는 13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언제부터 한국 힙합이 성희롱에 이렇게 예민했지? 다들 입 싸물고 있었던 거 아닌가?"라며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그저 웃음뿐"이라는 글을 올렸다.

2017년 남성 래퍼 블랙넛은 키디비를 향한 성적 모욕이 담긴 음반을 발매해 논란이 됐다. 키디비는 블랙넛을 성폭력 범죄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과 모욕 혐의 등을 적용해 고소했다. 키디비로서는 자신이 남성 래퍼에 의해 성희롱성 가사로 고통을 받았던 만큼, 남성 래퍼 중심으로 알페스 논란이 제기되자 이를 꼬집은 것이다.


"알페스는 제2의 N번방" VS "본질 흐리는 극단적 비유"

래퍼 손심바가 알페스 논란에 불을 지핀 이후 청와대 국민 청원에 이와 관련한 글이 올라오면서 불길이 커지고 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알페스 처벌법(성폭력처벌특례법)'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알페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는가 하면 알페스 처벌법에 대한 Q&A(질문과 답)까지 적어 올려 놓았다.

하 의원은 15일 자신이 추진하는 알페스 처벌법에 대해 "개정하려는 법은 성폭력처벌특례법 제14조의2"라며 "성 착취물을 '영상물 등'으로 모호하게 정의하고 있어 그림이나 글을 명시해 불법 알페스를 막으려는 취지"라고 했다.

하 의원은 12일에는 "알페스는 남자 아이돌을 소재로 한 동성애 소설이나 만화"라며 "문제는 이 음란물을 사고 파는 시장까지 형성돼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판매 사이트를 통해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하 의원은 "요청자가 돈을 주면 원하는 사람 얼굴로 성 착취물을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2의 N번방 사태"라며 모자이크 처리된 관련 사진도 올렸다.


하지만 '알페스 논란=제2의 N번방' 사건으로 보는 건 과장이라는 주장도 있다. 위근우 대중문화평론가는 15일 KBS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본질을 흐리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성년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착취 영상물을 만들고 공유하던 범죄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상상해서 글로 쓰는 것을 동일한 범죄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위 평론가는 "N번방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극단적 비유"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는 "남성 커뮤니티에선 남성 아이돌 데리고 성적 대상화를 하는 것 아니냐라는 비판을 한다"면서 "그게 어떻게 보면 그동안 여성 아이돌에 대해서 남성들이 이런 식으로 성적 대상을 했었던 문제들을 제기한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박 개념으로 활용하는 게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위 평론가는 알페스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해서도 "팬픽션이라는 것은 창작 활동에 가까운 거지, 무슨 N번방 사태처럼 어떤 한 공간에 모여 착취물을 공유하고 소비하는 문화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알페스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 비판적 입장을 취할 것이냐와 별개로 해당 청원은 알페스에 대해 잘 모르고 올린 청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은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