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혈액형' 조성을 알면 보이는 것들

입력
2021.01.1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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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련한 슬픔'의 E 단조

편집자주

C major(장조), D minor(단조)… 클래식 곡을 듣거나, 공연장에 갔을 때 작품 제목에 붙어 있는 의문의 영단어, 그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음악에서 '조(Key)'라고 불리는 이 단어들은 노래 분위기를 함축하는 키워드입니다. 클래식 담당 장재진 기자와 지중배 지휘자가 귀에 쏙 들어오는 장ㆍ단조 이야기를 격주로 들려 드립니다.



조성은 음악의 혈액형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작품,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정식 명칭은 '교향곡 5번 C 단조 작품번호 67(Symphony no.5 in C minor, op.67)'이다. '교향곡(Symphony)'은 작품의 장르이고, '5번(No.)'은 작곡된 순서를, '작품번호(op.)'는 다른 곡과 구분하기 위한 고유번호를 뜻한다. 남은 건 'C minor(마이너·단조)'라는 외계어. 그 정체는 '조성(調性ㆍTonality)'이다. 비유하자면 이 교향곡의 '혈액형'으로 볼 수 있다. 혈액형으로 누군가의 성격을 추정하듯, 조성을 알면 곡 분위기를 미리 상상 가능하다.


장재진(이하 장): 조성은 학창시절 음악시간에나 들었을 법한 단어다. '장조(Major)'는 기쁘고, '단조(Minor)'는 슬픈 분위기라고 배웠던 기억은 나는데, 앞에 A, B, C 등 알파벳이 붙으니 복잡하다.

지중배(지): 쉽게 말해 조성은 어떤 음악의 정체성이다. 서양음악의 음(표)들은 정해진 특정 방식(음계)으로 조합돼 곡으로 탄생한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식재료를 어떤 레시피로 섞느냐에 따라 완성되는 음식이 달라지는 이치다. 모든 조성은 각자 고유한 음계에 기반한다. 그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음을 '으뜸음(Tonic)'이라고 부른다. 음식으로 치면 맛을 좌우하는 핵심 재료다. 국수를 만들 때 육수 재료로 돼지고기와 멸치 중 어느 것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국물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각각의 장조, 단조 앞에 붙은 알파벳은 바로 으뜸음의 이름이다. 예컨대 C 단조는 '도(C)'를 기초로 만들어진 음계다. '도'맛이 나는 음악이다.



: 그럼 음악에는 어떤 조성들이 있을까.

: 주로 쓰이는 조성은 대략 20여개 수준이다. 가장 기본적인 C 장조부터, E플랫 단조까지 다양하다. 그리고 각 조성은 '조표(Key signature)'와 짝을 이루는데, 악보 맨앞에 특정 음을 반음 올리는 샾(#)이나, 반음 내리는 플랫(♭)이 붙는 위치, 개수에 따라 조표가 달라진다.

: 음악 전공자도 아닌데 일반인이 조성을 이해하면 뭐가 좋을까.

: 외국에서 여행을 하다가 독특한 건축물의 겉모습(조성)을 보면, 외관을 통해 그 집의 용도나, 거주자(작품 분위기)를 추리해 볼 수 있는 원리와 비슷하다. 조성을 알면 작곡가의 의도와 숨겨진 이야기를 머리속에 그려볼 수 있다. 지금 내 기분에 어울리는 곡을 선곡할 때도 도움이 된다. 각각의 조성은 고유의 음계 특성으로 인해 듣는 사람에게 특정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현실 대변하는 E 단조



: 코로나19가 현재진행형인 요즘, 새해여도 우울하기만 하다. 이 계절과 어울리는 조성이 있다면.

: 'E 단조'가 먼저 떠올랐다. 높은음자리표 기준 '파(F)'자리에 샾이 하나 붙은 조성이다. E 단조의 으뜸음은 '미(E)'다. 이렇게 쓰여진 곡들은 대체로 '아련한 슬픔'을 자아낸다. 희망 가득한 1월이지만, 팬데믹의 절망도 가시지 않은 상황을 대변하는 듯하다.

: 그래서일까, 서울시립교향악단은 21일부터 이틀간 롯데콘서트홀에서 '슬픔'이라는 부제가 붙은 하이든 교향곡 44번을 연주한다. E 단조의 곡이다. 새해를 여는 공연 치곤 이례적인 프로그램이다. 실제로 서울시향 측은 선곡 배경을 두고 "절망 속에 길 잃은 우리의 모습을 대면하고, 솔직하게 애도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 하이든 작품이 생소하다면 비틀즈의 '일리노어 릭비'나 김광석의 '일어나'를 떠올려 보자. 이 노래들도 E 단조로 작곡됐는데, 마음을 움직이게 만드는 멜랑콜리함이 들어있다.

러시아가 사랑한 감성

: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조성이다. 실제로 다음달 4일 KBS교향악단이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과 7월, 9월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연주하는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0번이 모두 E 단조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작곡가들이기도 하다.

: 서유럽에서 러시아 정서를 가진 음악을 지휘했을 때 오케스트라와 관객들로부터 호평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한국 음악인들이 그런 분위기를 표현하는데 탁월하다는 것이다. 통기타와 연주되며 국내에서 오랜시간 사랑받은 대중가요들이 E 단조를 자주 썼고, 한국전쟁 전후 러시아 번안가요들이 사랑받았던 역사적 배경과 무방하지 않을 듯 하다. 알게모르게 우리 DNA 속에는 E 단조와의 친밀함이 녹아 있었던 것이다.




장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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