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공평한 시간? 황제에게 16년은 찰나였다니

입력
2021.01.16 10:00

<57> 장쑤성 ③창저우 엄성과 우시 혜산고진


마음속의 약속도 지켜야...계찰괘검의 땅, 창저우 엄성

양저우에서 경항대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약 100km 내려가면 창저우(常州)에 이른다. 기원전 춘추시대 오나라 땅이었다. 마음속 약속을 지키고자 무덤 옆 나무에 보검을 남긴 계찰(季札)의 봉읍으로 연릉(延陵)이라 했다. 사마천은 ‘오태백세가(吴太伯世家)’에서 계찰을 일러 인자하고 덕성이 풍부한 군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계찰괘검(季札挂剑)’의 땅 창저우는 수나라 시대에 처음 등장하는 지명이다.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을 가면 2,800년 역사를 지닌 춘추엄성(春秋淹城) 유적지가 있다. ‘명청 시대를 알려면 베이징, 수당 시대는 시안, 남송 시대는 항저우, 춘추 시대는 엄성을 봐야 한다’고 자랑한다. 외성과 내성, 가장 안쪽의 자성까지 해자를 세 번이나 건너야 한다. 건설 계획도를 보니 당시로서는 그야말로 백공불파다. 1930년대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1958년에 청동기, 도기와 함께 쪽배가 출토됐다. 천하가 개벽한 이후 최초의 배라는 칭호와 함께 베이징의 중국역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 난공불락의 성은 누가 세웠을까? 그저 말만 무성하다. 산둥성 취푸에 엄국(奄国)이라는 작은 나라가 있었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에 반기를 들었으나 실패하고, 남쪽으로 도주해 세운 도읍이라는 설이 있다. 고대에는 ‘엄(奄)’과 삼 수가 붙은 ‘엄(淹)’이 통용됐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오나라와 월나라가 쟁패를 겨루던 위험 지역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웃 나라에 멸족 당한다.

계찰이 거주했다는 가설도 있다. 넷째 아들로 태어난 계찰은 왕위 계승을 거절하고 세 형의 왕위 계승을 지켜봤다. 마지막까지 왕위를 사양하니 조카가 즉위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또 다른 조카 합려가 왕위를 찬탈하자 평생 오나라 도읍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엄성을 짓고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는 이야기다. ‘오래 머무른다’는 뜻인 '엄류(淹留)'는 그저 체류한다는 뜻에 더해 상종하지 못할 인간과의 절교를 내포하고 있다. 200년도 더 흐른 후 초나라 시인 굴원도 엄류를 시어에 담았다. 정적의 중상모략을 견디지 못하고 세태를 비관했다. 서글프고도 비장한 가락의 ‘이소(离骚)’다. 총 378행 중 후반부의 6행은 이렇다.


관복의 패옥이 정말 성대하고 아름다워라! 뭇사람들이 숨기고 가리는구나(何琼佩之偃蹇兮, 众薆然而蔽之). 오로지 이 무리를 믿을 수 없음이니, 시기하다가 뜻이 꺾일까 두렵구나(惟此党人之不谅兮, 恐嫉妒而折之). 어지러운 시절이라 쉽게 변할지니, 어찌 다시 그들과 오래 머물 수 있으랴(时缤纷其变易兮, 又何可以淹留)
굴원의 '이소' 중 후반부 6행

이렇게 많은 사당...황제가 사랑한 옛 마을, 혜산고진

창저우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우시(无锡)로 간다. 북쪽으로 장강이 흐르고 남쪽에 5대 담수호인 태호(太湖)가 있다. 태호와 이어진 혜산(惠山) 자락에 역사문화가 풍성한 옛 마을이 있다. 혜산고진은 최근 최고 등급의 5A급 관광지로 승격됐다. 북문으로 들어가 무지개다리가 이어진 도랑을 따라 들어간다. 현지인은 사찰 아래 제방 따라 흐르는 개울, 사당경(寺塘泾)이라 부른다. 용두하(龙头河)라는 별칭도 있다. 대운하를 거쳐 청나라 강희제와 건륭제가 배를 타고 방문해서다.

마을 안으로 300m가량 들어서니 삼문사주오루(三门四柱五楼) 형태의 패방이 나온다. ‘산골짜기에 사는 기룡’이라는 암학기룡(岩壑夔龙)이 새겨져 있다. 기룡은 신화를 기록한 ‘산해경’에 등장한다. 소처럼 생겼으나 뿔이 없고 다리가 하나다. 한 번에 7,000리를 헤엄치는데 잠수할 때 풍우가 몰아치고 해와 달처럼 밝은 빛을 뿜고 우레 소리를 낸다. 이 신비한 동물을 끄집어낸 인물은 엄세번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재상이자 간신으로 유명한 엄숭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세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으며 당대의 귀재로 알려져 있다. 반대쪽에는 추적광의 인걸지령(人杰地灵)이 새겨져 있다. 추적광은 강남 일대의 과거 시험을 총괄하는 호광제학부사를 역임했고 수많은 인재를 발굴했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일심동체로 공덕 패방을 세웠다.

고진을 가면 늘 사당과 만난다. 집성촌이면 두어 개 정도 있다. 아무리 큰 고진이라도 10개는 넘지 않는다. 그런데 혜산고진에는 사당만 100여개에 이른다. 그야말로 사당 천국이다. 곳곳에 사당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국가중점문물로 보호되는 사당군으로 인해 혜산고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예비 명단에 들어가 있다. 곧 등재되고도 남을 듯하다.


패방을 지나니 전무숙왕사(钱武肃王祠)가 나타난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다시 통일을 이루기까지 약 70년 동안 화북지방은 오대가 이어지고 남방은 10개의 나라가 할거한다. 항저우를 도읍으로 십국 중 하나인 오월(吴越)을 세운 무숙왕 전류를 봉공한 사당이다. 전류는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항’이란 말을 창시했다고 알려졌다. 쑤저우와 항저우를 발굴한 왕국이었다. 오왕전(五王殿)은 3대에 걸쳐 5명의 왕이 71년 동안 통치했음을 알려준다. 전류의 초상화 위에는 강희제가 하사한 보장강산(保障江山) 편액이 걸려 있다.

혜산사 산문은 2층 누각이다. 건륭제가 칭찬한 강남제일산(江南第一山) 현판은 당대 화가 치바이스의 제자 리커란의 필체다. 1층에 석혜승경(锡惠胜境)이 보인다. 서쪽의 혜산과 동쪽의 석산 사이의 영산호를 따라 형성됐다. 해발 300m 정도로 나지막한 산이다. 고진은 해발이 겨우 8m다. 2,000m 이상인 지방이 워낙 많아 이렇게 낮은 동네에 오니 낯설다. 혜산을 둘러싸고 사당은 물론이고 사찰과 함께 아름다운 정원, 유명한 샘물도 있다.


산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추충공사(邹忠公祠)가 있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에 공덕 패방의 주인공인 추적광이 북송 시대 조상인 추호를 봉공하려고 처음 세웠다. 추호는 황제에게 간언하고 상소를 관리하며 관리를 감독하는 관직인 정언과 병부시랑을 역임했다. ‘송사(宋史)’에도 기록된 인물로 ‘충(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패방 자리에 있던 사당이 훼손됐고 청나라 강희제 시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건했다. 신위를 모시는 향당에 충공 추호와 지원공 추적광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산문 안 오른쪽으로 기창원(寄畅园)이 있다. 원래 혜산사의 승사였다. 명나라 가정제 시대 진금이 인수해 정원을 꾸미고 풍곡산장(凤谷山庄)이라 했다. 병부를 비롯해 오부의 상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진씨 가문에 상속되다가 만력제 시대에 장거정이 추진한 개혁과정에서 해직된 진요가 다시 조성했다. 우울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서예가 왕희지가 쓴 ‘기창산수음(寄畅山水阴)’에서 이름을 따왔다. 산수의 재미에 빠지고 탁 트인 풍광에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호반을 따라 돌다가 멈추면 시선은 어디라도 다 그림이다. 정자를 둘러싼 나무가 물속으로 고요하게 스며드는 경관이다. 관직 잃은 상심 정도는 금세 물감처럼 풀리지 않았을까?



서재를 함정재(含贞斋)라 했다. 여전히 충정을 잃지 않았다는 선언이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구책이기도 했다. 사계절 호반의 변화에도 의연하게 책을 펼치고 앉은 모습이 상상된다. 본채인 와운당(卧云堂)에 산색계광(山色溪光) 편액이 걸려 있다. 색감과 빛깔이 꽤 예뻤나 보다. 강희제가 하사한 글자다. 넝쿨이 자라나는 담장에도 그럴싸하다. 강남 순행 길마다 방문한 건륭제도 옥알금종(玉戛金枞)이라는 글을 남겼다. 어려운 글자로 보이나, 흐르는 샘물과 호반을 둘러싼 가산(假山)을 뜻한다. 기창원에 매료된 건륭제는 황실 정원인 이화원을 만들 때 참고하라고 지시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양쪽으로 두 개의 문루가 나타난다. 오른쪽인 청송(听松)은 이천서원(二泉书院)으로 이어진다. 푸른 바탕에 금빛으로 쓴 전서가 인상 깊다. 명나라 강서제학부사를 역임한 학자인 소보를 봉공하는 사당이다. 이천은 그의 별호인데 혜산고진의 자랑인 천하제이천(天下第二泉)과 관련된 듯하다. ‘진정한 사대부가 되어야지, 가짜 학문으로 도를 닦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선비의 수양과 처세를 기록한 '소창유기(小窗幽记)'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의 평판만 따르는 위선자를 경계하라는 뜻이니 진사부(真士夫)는 최고의 평가다.


왼쪽인 관천(观泉)을 지나면 화효자사(华孝子祠)가 나온다. 동진 시대 효자로 소문난 화보를 봉공하는 사당이다. 효자가 된 사연이 기가 막힌다. 어릴 때 모친을 잃었다. 8세가 되자 부친은 남조의 송나라(역사에서는 유송이라 함)를 세운 유유의 군대에 종군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혼례를 올려주겠다고 약조했던 부친이 그만 전사했다. 70세가 되어서야 조카를 입양해 대를 이었다. 그때까지 혼인하지 않고 부친의 귀향을 기다렸다. 지금 보면 참 미련한 불효일 수도 있는데, 당시엔 미담이었던 모양이다. 세태가 수상하니 ‘효도를 으뜸으로 여긴다’라는 효위행수(孝为行首)를 다시 올려다보게 된다.



"16년이 찰나" 황제의 시간도 꽃 향기 속으로

소보의 별호이자 관천 문루와 이어지는 천하제이천이 나타난다. 부근에 육우를 봉공하는 육자사(陆子祠)도 있다. 당나라 시대 차성(茶圣)으로 알려진 육우는 차 끓이는 샘물에 대해 품평을 했다. 그중 두 번째로 좋다고 했다. 당나라 재상을 역임한 시인 이신은 달콤하고 상큼한 샘(감상천)이자 세상의 신성한 물(인간영액)이라 칭찬했다. 송나라 시인 소동파도 차 맛이 신선한 감동을 준다는 미사여구를 남겼다. 건륭제는 직접 필체를 남기기도 했다.

샘을 지나 돌다리를 건너면 어비정이 나온다. 혜산고진을 자주 찾은 건륭제가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황위에 오르고 16년이 지난 1751년에 쓴 시다. 비석에 새긴 8연 56자를 꼼꼼하게 읽어본다. 기창원의 풍광을 시작으로 구름과 나무, 명산의 승려, 음과 양의 반영,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과 풀을 읊더니 공무를 떠나 지난 일을 되새긴다. 느닷없이 ‘십육춘추일찰나(十六春秋一刹那)’라는 감회로 마무리한다. 16년 세월이 찰나처럼 느껴진 황제의 마음이 잘 전해진다.

찰나,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말이다. 북위 시대 인도에서 온 발타라와 법현이 번역한 ‘마하승지율(摩诃僧祇律)’에 나오는 말이다. 눈도 깜빡이지 말고 봐야 한다. 시간을 쪼개고 나누는 과정이라 복잡하다. 일찰나는 일념(一念)이고, 20념은 순(瞬)으로 눈 한번 깜짝이는 시간이다. 20순이 탄지(弹指), 20탄지가 라예(弹指), 20라예가 수유(须臾)다. 24시간은 30수유라고 한다. 거꾸로 돌아간다. 이제부터는 산수다. 수유는 48분, 라예는 144초, 탄지는 7.2초, 순은 0.36초, 일념인 일찰나는 0.018초다. 비석 위 조정(藻井)에 황제의 상징인 용이 내려다보고 있다. 황제나 서민이나 시간은 높고 낮음이 없다. 얼마나 평등한가? 마음껏 찰나를 즐겨도 좋으리라.


혜산사는 남조 유송 시대인 423년 처음 세워졌으니 1,600년의 역사다. 왕조를 거치며 훼손과 중건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군대와 이홍장의 회군(淮军)이 전투를 하면서 전화에 휩싸였다. 이홍장은 폐허가 된 혜산사를 중건했다. 대웅보전 1층 가운데 자리는 건륭제의 범우자운(梵宇慈云)이 차지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석가모니가 봉공돼 있고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앉았다. 여의(如意)를 든 문수는 가끔 봤으나 책을 읽는 보현은 처음 봤다.

밤이 내리면 고진은 색다른 풍광으로 갈아입는다. 옛날 무대인 수장각(绣嶂阁)이 예쁜 모습으로 치장했다. 전서로 써서 운치를 돋운다. 1층에도 검은색에 청색으로 쓴 전서가 있다. 어둡기도 하거니와 어렵기도 하다. 애써 읽으니 천연신균(天然神均)이다. 천지를 창조할 때 신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나눈 공기처럼 음악도 고루 퍼지라는 메시지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조명 덕택에 크고 작은 사당과 패방이 출몰한다. 이다지도 많으니 그 속에 담긴 역사를 배우려면 1주일로도 모자랄 듯싶다.

마을 끝자락에 패방이 나타난다. 오리향승(五里香塍) 편액이 작별 인사를 한다. 청명절 즈음 수양버들 가지마다 꽃이 피고 울긋불긋한 장관이 5리에 이른다는 마을이다. 얼마나 만발했길래, 골목마다 떨어진 꽃을 밟고 돌아가면 발바닥에서 향내가 난다고 한다. 어쩐지 혜산고진 발품 기행에 솔솔 꽃 향기가 피어난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