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에 붓 잡고 닭을 그렸다, '삼국 제패' 동양화의 대가가 됐다

입력
2021.01.1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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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수 화백 "'늦지 않았다' 격려 덕 포기 안 해"

편집자주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경남 양산의 안창수(76) 화백의 자택을 찾자, 반려견 동별이를 안은 안 화백이 반갑게 맞았다. 안 화백은 ‘안창수동양미술연구소’란 명패가 붙은 건물의 3층에 거주하며 그 옥탑방을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1945년생 해방둥이인 그는 작업실 소파에 앉아 살아온 인생을 거침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3시간에 가까이 말이 끊어지지 않았고 지루할 틈이 없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은퇴 후 그림 그리기에 몰두, 지금은 동양화의 대가로 우뚝 선 그의 삶이 한 편의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은퇴 후 막막함, 안 화백도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은퇴 후 화가의 길을 생각한 건 아니었다. 2003년에 30년 가까이 일한 한국수출입은행에서 정년퇴임 한 그 역시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퇴직하고 경제활동을 더 해보려고 했는데, 마땅히 할 일을 못 찾겠더라고. 이미 딸들은 다 결혼시켰지, 마누라랑 둘이 남았는데 마침 고향에 본가가 비어 있어서 내려와 살기로 한 거야.”

‘2004년 6월 15일.’ 안 화백은 처음 붓을 잡은 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고향인 양산에 내려와 지내던 중 서예를 취미로 둔 중학교 친구가 서실에 같이 다니자고 했던 게 계기다. 딱 예순(만 59세)이던 때다. 그러다 2005년 을유년, 푸른 닭띠의 해가 됐다. 닭띠였던 그는 닭을 하나 그려야겠다 생각했고, 닭을 그렸다. 반응이 꽤 좋았다. 지인들은 잘 그렸다며 너도나도 하나씩 그려 달라고 말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그 때부터 안 화백은 그림 그리기에 푹 빠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 화백은 중국 유학을 결심한다. 부산에 있는 한 갤러리에서 닭 그림전을 한다고 해 방문했는데, 그림을 보면서 갤러리 관장에게 중국에 가서 그림을 배워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 마침 그 곳에서 직전 전시회를 연 사람이 중국에서 유학을 한 화가였고, 관장은 그 화가를 연결해줬다.


삼국제패의 꿈…60세 넘어 홀로 중국 이어 일본 유학길

"학위를 따기 보다 실습 위주의 교육을 받고 싶었는데, 중국미술대에 그런 과정이 있다고 했어. 학교로 찾아가서는 중국어를 못하니 지나가던 일본 학생을 붙잡고 안내를 부탁했지. 다행히 기숙사도 남는 방이 있었고, 일본어를 하는 교수님이 내 그림을 보고선 추천서를 써줘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어.” 그렇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중국에 갔다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수출입은행 재직 시 해외출장을 많이 다녀 외국에 혼자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은행에 다닐 때 일본에서 근무할 때 익힌 일어가 큰 도움이 됐다.

처음엔 6개월 만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대회에서 상을 타면서 그의 계획은 틀어(?)진다. 중국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중국 호모배 외국인전국서화대전에서 닭 그림으로 입선했다. 이듬해에는 중국 임백년배 전국서화대전에서 호랑이를 그려 1등상을 받았고, 중화배 전국서화예술대전에서는 독수리 그림으로 금상을 탔다. 오전 7시에 일어나 밤 12시 취침하기까지 밥 먹고 그림만 그렸던 노력이 결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안 화백은 “너무 기뻐서 울면서 서울에 사는 여동생과 통화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재능을 뒤늦게 알아차린 안 화백은 칼을 제대로 뽑기로 한다. 2007년 초 2년 간의 중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그는 곧장 일본 유학 길에 올랐다. 한중일 3개국에서 인정 받는 동양화가가 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슴 속에 품었다. “교토는 국제도시니까 미술 트렌드를 파악하기도 좋을 것 같았어. 일본에 도착해 학교로 가는데 만감이 교차하더라고. 이 나이에 이렇게 하고 있는데, 꼭 성공하고 싶었어.” 중국미술대에서 중국화를 2년 간 배운 그는 일본교토조형예대에서 약 1년 간 일본화까지 익혔다. 일본에서도 각종 상을 휩쓸었다. 일본소화미술회전에 입선했고, 전국수묵화수작전 외무대신상, 일본 전일전 준대상 등도 탔다.


그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주위에 좋은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미술대 교수에게 ‘선생님 내가 말이요. 늦게라도 이렇게 그리면 유명한 화가가 될 수 있소?’하고 물었어. 그런데 그 교수가 가능하다는 거야. 양주팔괴(揚州八怪) 중에서도 그런 화가가 있었다면서 말이야.” 양주팔괴는 중국 청나라 시기 상업 도시였던 강소성 양주에서 활약했던 여덟 명의 대표적인 화가를 말한다. 일본 유학 시절 스승인 교토조형예술대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교수는 “이렇게만 열심히 하면 5년 안에 대가가 될 수 있다”고 안 화백을 격려했다.

재능에 열정ㆍ적극성 더 해 동양화 대가로

안 화백이 화가로 알려지고 인정받게 된 건 타고난 재능 때문만은 아니다. 그에게는 젊은 사람 부럽지 않은 열정이 있다. “닭을 그리는데 닭 종류가 어떤 게 있고, 닭 발가락이 몇 개고 같은 걸 모르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그가 저녁마다 책을 보며 그림에 나오는 동물을 공부하는 이유다.

적극성도 남다르다. 2018년 경북 봉화군 국립백두대간수목원에서 ‘백두대간, 호랑이를 그리다’ 특별 전시가 열리게 된 건, 그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 일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백두산호랑이 관람이 가능하도록 호랑이 숲이 조성된 수목원인데, 안 화백은 자신을 '호랑이 그리는 사람'으로 소개하며, 호랑이 그림 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영화배우 도전에 기부까지…늙을 시간이 없다

“늙을 시간이 없다.” 안 화백이 주위에서 듣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2017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 캐스팅됐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는 일본 문부대신 역을 소화했다. 캐스팅사는 일본어를 잘 하는 70대를 찾던 중 안 화백을 찾아 영화 출연을 제안했다. 영화 출연을 계기로 공익 광고 모델로도 활약했다. 최근에는 온정을 나누는 일에도 열정을 쏟고 있다. 안 화백은 지난달 양산비즈니스센터에서 이웃나눔전을 개최해, 작품 판매수익금 200만원을 기증했다.

안 화백은 은퇴 후 삶을 막막해하는 이들을 위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자기가 걸어온 과정을 잘 살펴보면, 분명 못 하고 지나온 게 있을 거에요. 답을 알면서도 망설이고 있다면, 실행에 꼭 옮겨 보길 바랍니다."

양산= 채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