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 보이면 산다" 곳곳서 투기 징후… 자산시장, 치킨게임 시작됐다

입력
2021.01.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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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에 한 번 올까 한 상승장이라네요. 마지막 '찬스'라던데 무조건 올라타고 싶어요."

코스피가 3,100선까지 폭등한 지난 8일 회사원 강모(49)씨는 적금 3,000만원에 마이너스 통장까지 동원해 최근 만든 주식 투자금 4,000만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그는 "요새 같은 '불장'에선 조정이 올 거란 두려움보다 씨드머니(종잣돈)가 적은 게 더 힘들다"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충격을 뚫고 서서히 속력을 높이던 대한민국 자산시장이 마침내 '과속'의 영역에 진입했다. 얼마나 더 속도를 높일지 모르지만, 누구도 지금의 속도를 정상이라 말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투자자들의 '치킨게임'이 시작됐다고 평가한다. 언젠가 닥칠 충돌(자산 가격 급락)을 모두가 알지만 최대한 늦게까지 버티는 자가 이기는, 지금이라도 올라타야 할 것 같은 집단 최면이 현재 자산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등 곳곳에서, 평소 같으면 고개 저었을 초고위험 종목으로 돌진하는 투기의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

'덜 오른 주식' 일단 잡자... 잡코인까지 득세

10일 금융,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주식과 비트코인 시장에선 최근 합리적 투자를 넘어선 투기 징후가 역력하다. 대장주 가격이 가파르게 오르자 이유는 묻지 않고 어떻게든 초호황 열기를 따라잡으려는 심리다.

특히 지난해 일부 중소형 종목이 폭등하면서 이 같은 '묻지마 투자'에 불이 붙었다. 지난 6일 한국거래소는 코스닥 상장사 박셀바이오 거래를 하루 정지시켰다. 항암면역 치료제 개발업체인 이 회사 주가가 지난해 12월 29일 이후 3거래일 연속 상한가를 친 데 이어, 5일 역시 개인 매수세가 몰리며 20% 가까이 폭등하는 등 지나치게 올라서다. 이 기업은 지난해 9월 22일 2만1,300원으로 코스닥에 데뷔한 이후 상장 3개월 여만에 1,100%나 폭등했다.

대표적 저평가주로 꼽히는 건설주도 최근 급등세다. 최근 한 달 사이 대우건설(67.6%), GS건설(31.2%), 현대건설(18.6%) 등 대표 건설사 주식은 일제히 두자릿 수로 상승했다. 특별한 호재는 없지만, 경기 회복세에 비해 저평가돼 있다는 인식이 주된 상승 재료로 분석된다. 주식투자 15년 경력의 한 투자자는 "코스피와 코스닥을 가리지 않고 일단 덜 오른 종목을 노리면 기회가 온다는 심리가 깔려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런 유행은 개인투자자 사이에서도 폭넓게 감지된다. 직장인 오수현(38)씨는 최근 대학 동기 소개로 들어간 '주식 오카방(오픈카톡방)'에서 저평가 주식을 찾고 있다. 오씨는 "많이 오른 우량주를 사기엔 자금이 부족해 저렴한 주식 위주로 타이밍을 보고 있다"며 "주로 잘 모르는 코스닥 상장사들이 많아 위험 부담은 있지만 단타로 재미를 본 적도 많다"고 귀띔했다.

가상화폐 시장에서는 비트코인에 이어, ‘알트코인(후발 가상화폐)’이 뜨겁다. 2018년 초 개당 230만원대까지 올랐다 2년 반 동안 10만~20만원대에 머물던 ‘시총 2위’ 이더리움은 최근 150만원대까지 뛰었다.

비트코인에서 갈라져 나온 ‘비트코인 캐시’나 ‘비트코인SV’, 2017~2018년 광풍에 올라탔었던 ‘리플’, ‘이오스’ 등 다른 코인들도 마찬가지다. 열흘 사이에 두 배나 가격이 오른 것은 기본이고, 하루 만에 55% 이상 가격을 띄우는 코인도 쏟아지고 있다.

'만년 하락' 빌라, 미분양 아파트도 "없어서 못 산다"

'싸 보이면 일단 잡자'는 투기 징후는 부동산 시장에도 역력하다.

최근엔 수년간 아파트에 비해 잠잠하던 빌라(연립주택)로 매매 수요가 이동했다. KB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빌라 매매 가격 상승률은 6.47%로 2008년(7.87%) 이후 12년 만에 가장 많이 올랐다.

작년 11월말 기준 전국 미분양 아파트 물량은 2만3,620가구로 집계돼 2003년 5월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빌라나 미분양 아파트 모두 평상시엔 수요자들이 외면하던 대상이었지만 요즘은 '저렴하므로 향후 많이 오를 것'이란 심리가 매수세로 이어지는 것이다.

경기 북부 아파트값 상승세도 주목된다. 한국부동산원의 올해 첫 주(4일 기준)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동두천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 대비 0.81% 올랐다. 관련 통계를 작성한 2012년 5월 이후 최대 상승폭이다. 지행동 인근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요즘 매수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동두천은 수도권 비규제 지역으로 묶이지 않았는데도, 집값은 2018년부터 3년 연속 하락을 면치 못했다.

동두천 지행동 ‘부영 9단지’에 사는 A씨는 새해 들어 경기 북부(양주ㆍ동두천) 지역까지 옮겨 붙은 투기 수요를 피부로 체감한 듯 최근 “저희 아파트에 매물이 한 개도 없는 건 처음 봅니다”라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적었다.

"급등장에선 투자하지 않는 것도 투자"

이런 묻지마 투기의 징후는 "상승장에서 나만 뒤처질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이른바 '포모(FOMO·Fear Of Missing Out) 증후군' 심리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투자를 안하면 바보로 여겨지는 제로금리 시대에 등 떠밀리듯이 어쩔 수 없이 고위험 고수익투자에 떠밀리는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직장인 유모(40)씨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1억 넣어 10억 수익 인증' '올해 200% 수익률' 같은 글을 볼 때마다 '현타(현실자각 타임의 준말)'가 온다"며 "월급만 믿다가 거지 꼴 못 면한다는 생각에 너도나도 투자를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금융기관에서 엄청난 규모로 돈을 빌려 하는 '빚투' 규모도 크게 늘었다. 지난 7일 기준 증권사에서 빌린 돈을 뜻하는 신용융자잔고는 사상 첫 20조원을 돌파하며 1년 전(9조2,000억원)에 비해 2배나 급증했다. 지난 7일 기준 시중은행의 신용대출 잔액은 134조1,015억원으로 지난해 12월 31일(133조6,482억원) 이후 4영업일만에 4,534억원 늘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과속 국면의 자산시장은 미세한 충격에도 자주 요동쳤다.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투자 피해도 극심해진다. 전직 증권사 PB는 "유동성이 쌓아올린 거품의 최대의 적은 변동성"이라며 "급등 장세에선 투자하지 않는 것도 투자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지금은 빚투로 자산가격이 크게 오른 것 자체가 최대 리스크"라며 "많이 오를수록 조정도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아름 기자
김지섭 기자
곽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