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 없이 끓인 '채식 해장국', 다시마로 감칠맛을 낸 '비건 떡볶이'.
비싸고 구하기 힘든 비건(Vegan) 식품이 아니다. 동네 마트나 편의점에서 언제든지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다. 소수의 문화로 취급 받았던 채식이 실생활로 성큼 다가왔다.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물건을 구매하는 '가치소비', 친환경을 넘어 환경적 가치를 필수로 생각하는 '필(必) 환경' 트렌드가 맞물리면서 수요가 늘고 있다. 식품업계는 물론, 패션·뷰티업계까지 '비건족'을 잡으려는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비거노믹스'(비건+이코노믹스)란 신조어까지 탄생했다.
10일 한국채식협회에 따르면 국내 채식인구는 2008년 15만명 수준에서 2018년 약 150만명으로 10년 동안 10배 가량 증가했다. 아직 주류시장으로 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채식을 유별난 식습관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고 환경을 생각해 함께 동참하려는 흐름도 늘면서 사업성이 커지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건강한 먹거리를 찾으려는 움직임도 소비심리에 반영되고 있다.
비건 식품은 이제 동네마트에서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동원F&B는 미국 식물성 고기 생산업체 비욘드비트와 독점 공급계약을 맺고 지난해부터 대체육으로 만든 '비욘드 버거'를 판매하고 있다. SPC삼립도 지난해 3월 미국의 인공육류 제조업체 '이트저스트'(Eat JUST, Inc.)와 손을 잡아 올 상반기에 저스트 에그 등 비건 식품을 독점 유통하기로 했다.
비건 식품에 대한 품질도 높아지면서 수요가 더 늘고 있다. 풀무원의 비건 라면 '자연은 맛있다 정면'은 칼칼한 매운 맛으로 채식을 하지 않는 소비자에게도 인기를 끌면서 출시 4개월 만에 누적판매량 200만개를 넘어섰다. 풀무원 관계자는 "고기 특유의 풍미가 부족한 단점을 보완해 '채식은 맛이 없다'는 편견을 깼다"고 분석했다.
대형마트에선 채식을 위한 별도의 공간까지 등장했다. 롯데마트는 지난달 잠실점 6층 식당가에 비건 식당인 '제로비건'을 열고 채식 해장국, 새송이 강정 등 채식 메뉴를 판매 중이다. 롯데마트의 한 관계자는 "식당 코너는 주로 대중성을 따져 메뉴를 선정하게 되는데, 잠실·강남 부근에 비건 커뮤니티가 형성돼 있는 것을 확인하고 비건 식당을 열었다"며 "아직 운영한지 얼마 안 됐지만 반응이 꾸준하게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마트는 전국 23개점에 채식주의존을 도입해 식물성 원료만 사용한 냉동만두·냉동밥, 대체육 등을 판매 중이다. 지난해 8월 21개 지점의 코너로 시작했는데, 반응이 좋아 확대 운영에 나선 것이다.
비건 식품은 편의점 매대까지 채웠다. 최근 GS25는 육류 성분을 사용하지 않은 '비건 떡볶이'를, CU는 콩불고기 바질파스타 등으로 구성된 '채식 도시락'을 선보였다. 대중성 있는 식품을 비건화해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하겠다는 전략이다.
식품분야에 한정됐던 비건 사업은 최근 패션·뷰티업계로도 확대되는 중이다. 패션은 옷의 기능뿐만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가 구매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윤리적인 패션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모피로 만든 옷을 줄이고, 동물복지 시스템을 준수한 다운(RDS) 인증을 받은 의류를 선보이는 식이다.
화장품 업계에도 인체 유해 성분 배제되고 동물보호의 가치가 담긴 화장품 찾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다.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비건 브랜드 '이너프프로젝트'를 론칭하고 동물성 재료를 사용하지 않은 기초 화장품 7종을 선보였다. 아모레퍼시픽의 한 관계자는 "지금은 MZ(밀레니얼+Z세대)세대를 중심으로 비건 관련 상품이 소비되고 있는데, 세대변화에 따라 향후 이들이 표준이 될 것이라 보고 경쟁 우위를 잡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는 것"이라며 "비건을 배제하고 장사하기는 어려워진 시대"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