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두사, '강한 여성'에 씌워진 마녀프레임

입력
2021.01.0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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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에 숨은 안티페미니즘



위 그림은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선구자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가 그린 '메두사'다. 괴물 메두사가 영웅 페르세우스에게 참수당하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섬뜩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나무 틀에 린넨을 씌워 만든 방패 모양 캔버스에 그린 유화다.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델 몬테 추기경이 메디치가의 페르디난도 1세에게 선물해 메디치가 소장품이 되었고, 현재는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참수는 카라바조가 자주 그린 소재다.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나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비드' 등에서도 나타나듯이, 그의 작품에는 늘 어둡고 신비한 분위기, 죽음, 광기, 폭력성이 도사리고 있다. 고전주의를 이끌었던 동시대 화가 니콜라 푸생의 눈에는 "그가 회화를 파괴하려고 태어난 사람"으로 보일 정도로 매우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화풍을 드러냈다. 어두운 배경 속에 강렬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진 인물을 배치함으로써 빛과 어둠을 극명하게 대비시킨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의 개척자로서, 루벤스, 렘브란트, 벨라스케스 등 바로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카라바조는 현실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사실주의적으로 묘사했다. 예수와 성모 마리아, 성인들도 주변의 보통 사람들, 심지어 거지, 범죄자, 매춘부 등 하층민의 모습으로 그려 성스럽고 이상적인 종교화를 원했던 가톨릭교회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거칠고 세속적인 그림에 깃든 어떤 미묘한 진실성의 함축과 의미는 많은 이들을 매혹했다.

카라바조의 '메두사'는 여성이 아닌 남성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그의 자화상이기 때문이다. 왜 자신의 모습을 하필 흉측한 메두사의 얼굴로 그렸을까? 카라바조는 성질이 사납고 불같아 늘 싸움과 폭력에 휘말렸고,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른 후 도망 다니다가 38세에 길거리에서 죽었다. 자신의 평탄하지 못했던 삶을 메두사의 험악한 얼굴을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고통과 분노로 부릅뜬 눈, 비명을 지르는 입, 잔뜩 찡그린 이마, 그리고 목에서 분출하는 선홍색 핏줄기. 머리가 잘려 나갔지만 메두사는 아직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머물러 있다. 그의 표정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종말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충격과 공포, 의심과 부정의 의식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메두사가 누구인가? 혀를 날름거리는 끔찍한 뱀 머리카락과 황금 날개, 용의 비늘로 덮인 몸통을 가진 요물이지만, 원래는 아테나 신전의 아름다운 여사제였다. 따라서 메두사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과 사악한 마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마녀인 동시에, 그 얼굴을 보자마자 돌로 굳어질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인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메두사는 서구사회에서 오랫동안 여성에 대한 혐오와 경계의 아이콘이었다. 강하고 똑똑한 여성은 남성의 우위와 통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고, 메두사는 이들을 악마로 만들어 버리려는 세력에 의해 차용될 수 있는 훌륭한 매체였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는 메두사에게 당시 서양문화에서 유행한 팜 파탈 이미지까지 덧입혀진 데다가, 이즈음 등장한 페미니즘의 상징이 되어 그 부정적 이미지는 더욱 굳어졌다. 메두사는 옛 신화의 괴물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무엇이었다.

현대사회에서도 메두사는 힘을 가진 여성들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소비된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장관, 낸시 펠로시 미 하원 의장 등 여성 정치인, 여성 지도자들은 자주 메두사로 비유되곤 했다. 정치적 영역 외에도 경제, 예술, 대중문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마사 스튜어트, 마돈나, 오프라 윈프리 같은 영향력 있는 여성들이 뱀 머리카락을 가진 메두사의 이미지로 합성된 바 있다. 안티페미니즘(antifeminism) 진영에 선 이들이 이 여성들을 남성의 영역을 침범하는 위험한 존재로 보고, 스스로를 메두사의 목을 베는 페르세우스로 자처한 것이다. 미국의 인권 운동가 수전 B. 앤서니는 이런 씁쓸한 현실을 "여성은 이 남성들의 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잘릴 것이다"라는 반어법적 수사학으로 조롱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첼리니의 유명한 조각상 '메두사의 머리를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의 패러디물이 SNS에서 퍼져나가 세간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페르세우스로 분한 트럼프가 클린턴의 목을 높이 쳐들고 있는 이미지였다. 이것 말고도, 힐러리 클린턴을 메두사로 만들어버린 수없이 많은 패러디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방출되었다. 그들은 이 풍자 이미지 속에 숨겨진 여성 혐오를 의식하지 못했다. 자신들은 다만 선과 정의의 편에 있다고 생각했고, 클린턴은 페르세우스같이 선하고 용감한 남성에 의해 처단돼야 할 사악한 존재일 뿐이었다. 대통령 후보에 대한 가혹한 비판과 조롱은 일반적 현상이지만, 클린턴에 대한 공격은 대부분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그는 치마 대신 바지 정장을 입고 전통적 성 역할에 따르기를 거부하는 페미니스트, 정치적 야심이 있는 여성이었다. 강력한 여성의 표본인 클린턴은 특히 백인 남성들에게 심한 반감을 샀고, 한때 미국 내 한 투표에서 지난 1,000년간 가장 사악한 인물 6위에 뽑히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메두사 문법으로 읽히는 여성 정치인은 단연 추미애 장관이다. 보수 언론들은 눈을 치켜뜨거나 날 선 표정을 짓는 찰나의 좋지 않은 인상이 찍힌 사진을 의도적으로 선택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그가 얼마나 고약한 사람인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며 비호의적인 기사의 타당성을 입증, 설득하려고 한다. 그런 기사들의 댓글에서는, 많은 이들이 그의 외모를 '악독한' '못된' 등과 같은 부정적, 혐오적 단어들과 연관시키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매우 효과적으로 '나쁜 이미지' 만들기에 성공한 것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보수, 진보의 정치적 성향을 넘어선, 여성의 정치 사회적 부상에 대한 '젠더 백래시(gender backlash: 성평등, 젠더 운동에 대한 반발 심리 및 행동)' 현상도 엿보인다. 그는 어느새 전통적인 여성의 미덕에서 먼 '여자답지 못한' '드센' 악녀, 혹은 마녀가 된 것이다. 이른바 한국판 메두사다.

메두사 프레임은 핑크색 원피스 소동의 주인공, 정의당 류호정 의원에게도 씌워졌다. 그는 때와 장소에 맞게 옷을 입으라는 점잖은 훈계성 충고에서부터 원색적 비난과 성희롱을 서슴지 않은 극우 사이트 '일베'에 이르기까지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융단 폭격을 받았다. 정의당의 장혜영, 류호정 의원은 적지 않은 이들에게 남성의 권위와 기득권 사회의 보수 가치에 사사건건 거슬리는 '되바라지고 버릇없는' 페미니스트로 인식되고 있다. 2030세대 메두사들의 등판이다.

이들 말고도 우리 사회 곳곳에 얼마나 많은 메두사가 있을 것인가. 고대신화의 하이브리드 괴물뱀이 수천 년의 시간을 뚫고 나와 성차별 의식을 숙주로 하여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한 '슬프게 재미있는' 현상이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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