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심장부, 민주주의의 전당인 워싱턴 국회의사당이 유린됐다. 의회정치 한복판이 퇴임을 앞둔 대통령의 지지 시위대에 점령당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결과 불복 선동이 빚은 민주주의의 대참사였다. 오는 20일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식을 앞두고 미국 사회의 불안과 혼돈이 계속될 전망이다.
6일(현지시간) 바이든 당선인의 대선 승리 확정을 위한 상ㆍ하원 합동회의가 열리던 의사당에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 수백명이 난입해 4시간 동안 난장판을 만들었다. 회의는 중단되고 의원들은 대피해야 했다. 1954년 이후 몇 차례 의회에서 총격 등 사건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대규모 인원이 난입한 사태는 처음이다. 6시간 만에 재개된 회의에서 바이든 당선인은 306 대 232로 선거인단 270명 이상을 확보해 당선이 확정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승인 직후 성명을 발표해 "선거 결과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지만 1월 20일에는 질서정연한 전환이 있을 것"이라고 사실상 대선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나 이날 의회 경찰이 쏜 총에 여성 시위대 1명이 맞아 숨지는 등 4명이 사망했고 52명이 체포됐다. 의회 인근 공화ㆍ민주당 건물에선 폭발물도 발견됐다. 폭동 진압 경찰에 이어 군 병력까지 투입돼 겨우 상황은 진정됐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는 통행금지령까지 내려졌다. 244년 된 미국식 민주주의 역사에 가장 부끄러운 날이란 개탄이 쏟아졌다.
미국 정치권, 재계는 물론 전 세계가 경악하고 규탄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 또는 대통령 직무수행 불능을 규정한 수정헌법 25조 발동이 거론된다. 문제는 이번 난입 사태를 주도한 시위대가 대부분 백인 남성, ‘평범한 미국인’이었다는 점이다. 트럼프 시대를 열었던 이들의 좌절과 분노가 이제 의사당 난입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길 정도가 됐다는 게 심각하다는 지적이다. ‘트럼피즘’이 또 다른 막장을 열었다는 탄식도 이어지고 있다.
폭력 사태 1차 책임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바로 집요한 대선불복이다. 그는 사태가 심각해지자 시위대의 해산을 언급했지만, 현재의 행동이 2024년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정치적 포석이란 의심을 피하기 힘들다. 20일까지 예정된 임기 내 또다른 소요 사태를 방임하거나 퇴임 후에도 비슷한 일을 부추길 수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며칠 전부터 6일 집회에 지지자 집결을 촉구했다. 대선이 열리는 4년마다 형식적으로 합동회의를 열어 새 대통령 탄생을 확인하고 축하하는 자리에 대선 불복 재를 뿌리겠다는 예고였다. 오전부터 백악관 앞에는 수천명의 지지자가 모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선거 부정 주장을 계속 제기했고, 급기야 이들 앞에 직접 나서 “대선 불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며 ‘봉쇄’를 언급하는 연설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상황이 심각해지자 “지금 집으로 돌아가달라”는 영상을 올렸다. 하지만 이 또한 참모들의 간곡한 호소 때문에 마지못해 나왔다는 보도도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다시 트위터에 “이날을 영원히 기억하라”고 지지자를 독려하는 등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는 “4년간 적대와 분열로 휘저어놓은 (트럼프의) 대통령 직이 분노, 무질서, 폭력의 폭발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의회 난입 상황은 일단락됐지만 후폭풍은 커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시위대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면서다. 합동회의 초반 애리조나주(州) 선거 결과 인증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던 테드 크루즈 공화당 상원의원조차 난입 사태 후 “폭력에 가담한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는 대의명분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같은 당 밋 롬니 상원의원은 “오늘 반란 사태는 대통령이 유발한 것”이라고 공박했다. 백악관 참모진이 사표를 제출하는 등 반발도 커지고 있다.
1만4,000여개의 기업이 가입한 전미제조업협회(NAM), 대기업 최고경영자연합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 등 경제계도 트럼프 대통령의 시위 선동을 문제 삼았다. 일부에선 수정헌법 25조를 적용, 트럼프 대통령을 쫓아내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직을 대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출발부터 심각한 위협을 안게 됐다. 20일 취임 후에도 트럼프 대통령과 지지자들의 분열 시도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5일 실시된 조지아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 2명이 모두 승리하며 행정부와 하원에 이어 상원까지 장악하게 된 점은 국정 운영 측면에서 긍정 요소다.
다만 공약으로 내세웠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을 모두 품은 미국인의 대통령’으로 가는 길은 험난해 보인다.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했던 7,400만명의 유권자 중 '미국우선주의'를 포기하는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인종과 성별·빈부 갈등도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바이든 당선인은 “민주주의와 법치가 전례 없는 공격을 당하고 있다. 이 사태는 시위가 아니라 반란”이라고 강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극단주의자 배제를 넘어선 새로운 국정 운영 해법도 요구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