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는 처음부터 달콤하고 향기롭지는 않다

입력
2021.01.0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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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닐라는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도 익숙한 향이다. 바닐라는 아이스크림에서 가장 인기 있는 향이고 초콜릿, 커피, 코코아 음료, 과자 등 많은 식품 등에 쓰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고, 왜 좋아하고, 그 맛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나마 생산과정 정도가 설명하기 쉽다. 바닐라는 수많은 난초류 중에 식용하는 부위가 있는 유일한 작물이다. 오늘날에는 마다가스카르, 인도네시아, 멕시코, 타히티 등 여러 곳에서 재배되지만 1800년대 중반까지는 오직 멕시코에서만 재배가 가능했다. 마야문명 때부터 아즈텍인들이 초콜릿 음료를 만들 때 바닐라를 함께 사용했는데 그것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그런 바닐라가 1520년에 스페인을 통해 유럽에 소개되었고, 1602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약종상인 휴 모건이 초코 음료에만 사용되던 바닐라를 따로 단독으로 사용해도 좋을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닐라의 맛에 완전히 사로잡혀 남은 통치기간 동안 그녀가 먹거나 마신 모든 것에 바닐라를 첨가했다고 한다. 바닐라는 점점 인기가 높아져 1700년대가 되자 주류, 담배, 향수 등에도 사용되었다. 바닐라의 인기가 높아지자 1800년대에는 바닐라 나무를 유럽으로 가져왔고, 다시 인도양의 섬들로 옮겨 키워졌다. 나무는 잘 자라고 꽃도 피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는 맺지 않았다고 한다. 바닐라는 1년에 딱 하루 겨우 몇 시간 동안만 꽃이 피는데, 그때 바닐라 꽃 안쪽에 숨겨진 암술과 수술이 만나게 해줄 특별한 곤충(벌)이 필요한데 맥시코를 제외하면 그런 벌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19세기까지 멕시코는 바닐라 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그러다 1841년 바닐라를 효과적으로 인공 수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 다른 지역에서도 생산이 가능해졌고, 현재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서 가장 많은 양의 바닐라를 생산하는데 품질도 최고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바닐라의 열매 그대로는 아무런 맛도 향도 없다. 인간이 많은 노력을 들여 적절하게 가공을 해야 제대로 향이 만들어진다. 녹색의 생 바닐라 빈을 흑갈색의 바닐라 빈이 될 때까지 품온을 높여, 효소를 활성화시키고, 수분을 발산시키고, 식히는 과정을 4개월 정도 반복해야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바닐라가 된다. 생 바닐라에는 향의 원료가 될 수 있는 물질은 많지만 당과 결합한 상태라 향으로 느낄 수 없는데, 세포를 손상시키고, 온도를 높여 효소를 활성화시켜야 우리가 원하는 향이 점점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은 홍차의 제조 원리와 많이 닮았다. 홍차도 생잎을 말리고 비비는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효소를 활성화시켜야 맛과 향이 풍부해진다. 천연 그대로는 아무런 매력이 없는 난초의 속씨가 인간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향신료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비싼 바닐라를 좋아할까? 사실 바닐라를 생산하는 나라는 별로 없고, 향도 우리와 친숙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낯선 향은 우선 경계를 하고, 사람에 따라 호불호가 나뉘는 편인데, 바닐라 아이스크림만큼은 누구나 처음 먹어 보는 순간부터 좋아한다. 모두 낯선 바닐라 향을 맛보자마자 좋아하는 이유를 향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궁금해했는데, 가장 그럴듯한 이론이 우유에 바닐라향을 첨가하면 모유의 향이 되고 그것을 우리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바닐라는 알고 보면 우리와 꽤나 친숙한 향이다.

바닐라의 핵심 향기 성분이 바닐린(vanillin)인데 그것은 나무가 타거나 분해될 때 소량씩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나무의 목질에는 다량의 리그닌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불에 타면 여러 가지 향기 물질이 만들어지고, 그 중에는 상당량의 바닐린도 포함되어 있다. 도서관의 오래된 책이 많은 곳에서도 종이의 리그닌이 천천히 분해되면서 여러 향기물질이 만들어지는데 그 중에도 바닐린이 상당량 있다. 우리의 주변에 바닐라 빈처럼 바닐린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 있는 작물은 없지만 알고 보면 우리에게 조금씩 바닐라를 느끼게 해준 것은 항상 곁에 있었던 것이다.

최낙언 편한식품정보 대표ㆍ식품공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