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출간된 다드래기 작가의 만화 ‘안녕 커뮤니티’는 쪽방촌을 배경으로 서로의 안녕을 묻는 고령층의 삶을 그린다. 2016년부터 한 웹툰 플랫폼에 연재됐지만 큰 주목은 받지 못했던 이 작품은 단행본 출간 후 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이후 연말 각종 매체가 꼽은 ‘이달의 추천도서’ ‘올해의 책’에 선정됐다. 작가 스스로 “인생의 독기를 다 끌어 모아 완결한 작품”이라던 만화는 네모 반듯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지고서야 비로소 걸맞은 관심을 받게 됐다.
“출판산업은 사양길”이라는 말은 지겨울 정도의 구문이다. 출판만화도 예외는 아니다. 17년 역사의 국내 최대 만화 전문서점 홍대 북새통 문고가 지난해 12월 폐업 소식을 알렸고, 1995년 창간된 만화잡지 ‘이슈’도 지난해 11월호를 마지막으로 잠정 휴간에 들어갔다.
안타까운 소식들과 함께 새해를 맞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국내 출판만화 시장의 잠재력을 지레 저평가하긴 이르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통계에 따르면 국내 만화출판업 매출액은 2015년 이후 연평균 8.3% 추세로 꾸준히 증가 중이다. 지난 2016년 교보문고의 만화부문 판매량은 역대 최다를 기록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회의 소외되고 구석진 자리에 눈길을 던지는 양질의 만화들이 꾸준히 출간되며 우리 출판만화의 밝은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출판만화의 저력을 뒷받침하는 힘 중 하나는 문학동네, 창비, 보리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열린책들같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출판만화 시장에 뛰어든 종합 출판사들의 존재다. 창비의 경우 지난 2006년 차별을 다룬 인권만화집 ‘사이시옷’ 출간을 시작으로 ‘기분이 없는 기분’, ‘열세 살의 여름’, ‘올해의 미숙’, ‘나쁜 친구’ 등 최근 몇 년간 가장 주목할 만한 만화들을 내오고 있다.
문학동네는 2019년 베스트셀러를 차지한 ‘내 어머니 이야기’를 비롯해 완성도 높은 만화들을 꾸준히 선보여왔고, 열린책들은 자회사인 미메시스를 통해 양질의 해외 그래픽노블 소개에 앞장서고 있다. 보리출판사 역시 위안부 피해자 삶을 다뤄 만화계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미국 하비상을 수상한 김금숙 작가의 ‘풀’을 비롯해 다양한 만화를 출간한 대표적인 종합출판사다.
2016년 서교동에 문을 연 만화살롱 ‘유어마나’ 등 독립만화서점과 독립만화출판사들도 출판만화 시장의 재부흥을 이끄는 주역들이다. 2009년 시작돼 대표적인 독립출판물 행사로 자리잡은 ‘언리미티드 에디션-서울아트북페어’ 역시 신진 만화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만화 이용 현황 분석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디지털 만화만 이용한다'는 응답자가 67.4%에 달하는 반면 ‘종이만화만 이용한다'는 응답자는 4.0%에 불과하다. 블로그나 SNS같은 온라인 공간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작품을 소개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이 여전히 ‘책’이라는 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출판만화만의 감수성도 이유겠지만, 수익 창출이 가능한 몇 안 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기준 대형 플랫폼 3사(네이버웹툰, 다음웹툰,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이용 점유율은 전체의 91.8%를 차지한다. 사실상 3개 회사가 독점하고 있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이마저도 중간 에이전시를 통하면 수중에 남는 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서는 유료 연재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다. 최근 들어 딜리헙처럼 자유롭게 작품을 올리고 구독료도 작가가 직접 책정하는 오픈 만화 플랫폼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 작은 시장이다.
2017년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한 수신지 작가의 ‘며느라기’도 인스타그램 연재 당시 매주 60만명이 봤지만 해당 SNS 특성상 연재 중 수익창출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작가는 이후 출판사를 직접 차려 '며느라기' 단행본을 출간했고 플랫폼에서 정식 연재한 차기작 '곤'도 같은 방식으로 출간했다. 온라인에서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단행본이 출간되면 독자들은 책을 직접 '구입'해 본다. 출판은 여전히 훌륭한 콘텐츠에 합당한 가격이 지불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인 셈이다.
그렇다면 출판만화 시장 발전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만화 비평서 ‘지금, 독립만화’를 쓴 성상민 문화평론가는 “온라인과의 상생”과 “다양성만화 지원 확대” 두 가지를 꼽았다. 성 평론가는 “오프라인 출판 시장 축소는 부정할 수 없는 미래"라며 "전자책이나 온라인 오픈 플랫폼들과 적극 교류해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만화영상진흥원이 진행하고 있는 다양성만화지원사업을 보다 확대하고, 나아가 독립만화서점이나 출판사 같은 만화생태계 전반에 대한 국가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