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2,269억원이 투입돼 2001년 9월 19일 문을 연 비싼 몸이야. 나 한 두 살 때는 말이지, 정말 잘 나갔어. 2002년 6월 4일 한국 축구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 승리(폴란드전 2-0 승)의 환희, 그 해 가을 북한이 참가한 부산아시안게임 때의 감동이 아직도 생생해.
그 때만 해도 내가 축구의 성지(聖地)이자 평화의 상징이 될 줄 알았어. 그런데 스무 살이 된 지금 내 처지는 처량하다 못해 처참해. 대형 태풍에 지붕막이 날아갔는데, 내 주인은 돈이 없다고 나중에 고쳐준대.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게 뭔 줄 알아? 새 옷을 입어도 날 봐주고, 찾아와 줄 사람이 없다는 거야.
몇 년 전까지는 프로축구를 보기 위해 수 천 명씩이라도 꾸준히 찾아와 줘 존재의 이유는 느껴가며 살았는데, 구단은 5만5,982석 규모인 내가 자신들 형편에 비해 너무 큰 집이라며 작은 집으로 떠났어. 그나마 운동삼아 내 주변을 걷고 뛰는 사직동 주민과 반려견들이 있어 위안이 돼.
나를 유지하는 데 드는 돈은 시민들이 세금으로 메우는데, 시민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만 여기는 것 같아. 문제는 내가 나이가 들면서 이곳 저곳 치료할 곳이 많아진다는 점이야. 벌써부터 전기 통신 잔디 트랙 등 온 몸이 아파오기 시작해. 이대로 더 두면 대수술이 필요할 테고, 시민들에겐 더 큰 부담이 되겠지.
아직 살아갈 날이 많은 내가 더 가치 있게 쓰였으면 좋겠어. 시민들에게 세금 부담만 안기는 존재가 아니라 활력을 주고 더 나아가선 수익도 내며 사랑 받는 삶을 살고 싶어. 비슷한 시기 월드컵을 위해 태어난 ‘동기’ 10개 구장 가운데 상당수도 나와 비슷한 처지야. 스무 살이 된 우리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걸까?
1일 찾은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지난해 9월 태풍 마이삭이 남긴 상흔을 치유하지 못한 채 방치돼 있었다. 올해로 개장 20주년을 맞았지만 잔칫상은 언감생심, 방사형 기둥에 설치된 총 48개의 지붕막 가운데 찢어져 나간 9개를 수리하기 위한 예산조차 확보되지 않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스무 살의 첫 날을 맞았다.
2002년 스포츠시설 최초로 한국건축문화대상을 품으며 '작품'이란 평가도 받았던 이곳. 그러나 이젠 이 곳을 가까이 두고 사는 어느 누구도 '쓸모'를 쉽게 언급하지 못했다. 사직동에 사는 윤정옥(61)씨는 "주민들이 산책 하러 가끔 가는 곳"이라고 했고, 또 다른 주민은 김모(55)씨는 "큰 행사는 1년에 손에 꼽힐 정도로 열린다"며 "그냥 값비싼 산책로"라고 했다.
경기장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수희(56)씨는 "손님 대부분이 주민이나 야구장 관람객"이라며 "장사하는 입장에선 (주경기장에서)뭐라도 하는 게 좋지만 가끔 콘서트 할 때나 손님이 반짝 몰린다"고 푸념했다. 그는 "차라리 열리지도 않는 국제대회 개최를 대비해 주경기장을 닫아놓기보다 주말 지역 축구인들한테 대관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이 곳에선 2004년 12월부터 2019년 6월까지 약 15년간 A매치도 한 차례 치러지지 않았고, 2017년부터는 프로축구 경기도 열리지 않는다. 운영 적자는 세금으로 메운다. 인근 상인들은 "상권에 도움 되는 시설은 아니다"라고 했다. 주민과 상인 대부분 최근 수년 사이 이 곳에서 열린 가장 큰 이벤트로 '싸이 흠뻑쇼'를 꼽는데, 이마저도 가장 최근인 2019년엔 주경기장이 아닌 보조구장에서 열렸다.
본보가 지난달까지 2002 한일월드컵을 개최한 국내 10개 구장 운영주체들을 대상으로 정보공개를 청구, 최근 10년(2010~2019년)간 경기장 운영에 따른 손익 결과를 수집해 분석한 결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을 포함한 8개 구장이 적자 운영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수용 인원(6만6,422석)을 자랑하는 대구스타디움은 최근 10년 사이 200억원이 넘는 적자를 기록했고, 부산의 경우 지출내역 가운데 인건비 등을 제외한 유지보수비만 집계하고도 37억원에 가까운 적자를 냈다.
꾸준히 K리그 경기가 열린 울산문수축구경기장을 비롯해 전주 대전 서귀포월드컵경기장도 경기장 운영만으로는 적자를 피할 수 없었다. 월드컵 열기가 남아있던 2010년 이전까지는 수익성을 고민하거나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시기로 여겨졌지만, 이후에도 각 지자체와 시설관리공단 등 운영주체의 다수가 경기장 수익성 개선을 위한 뾰족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했단 얘기다. ‘월드컵 성공개최’에 매몰돼 건축 당시 사후활용 계획보다 규모를 키우고 외관을 꾸미는 데 치중한 대가를 오롯이 개최지 시민들이 치르고 있는 셈이다. 부지 선정과 설계 과정에서부터 사후 활용을 고민한 데다 많은 인구가 경기장을 활용해 같은 기간 수백억 원의 흑자를 낸 서울(791억1,000만원), 수원월드컵경기장(227억4,600만원) 정도만 스스로 일어섰다.
그나마 이 가운데 일부는 민영화 하거나 경기장 부지 내에 상업시설을 운영하면서 시민 부담을 줄이고 있다. 프로야구 SK 와이번스에 위탁 운영을 맡긴 인천문학주경기장, 경기장 주변 땅을 활용해 9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해 적자를 면하는 전주월드컵경기장이 대표적이다. 운영주체인 전주시 시설관리공단 관계자는 "영업일이 적은 경기장 운영만으로는 당연히 적자"라면서도 "월드컵 종료 이후 경기장 부지 내에 골프장과 웨딩홀, 사우나 등을 갖춰 수익사업을 발굴했다"고 밝혔다. 이곳은 최근 10년간 매해 수지율(지출에 대한 수익의 비율) 100%에 육박하거나 이를 넘겨 자립도를 갖춘 모습이다.
광주도 전주와 마찬가지로 경기장만으로는 적자(약 234억원) 운영 중이지만 경기장 부지 내에 세운 쇼핑몰 운영업체들로부터 임대료를 받아 흑자를 낸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경기장 활용에 대한 큰 고민을 떠안았다. 월드컵경기장 주경기장에서 홈 경기를 하던 프로축구 광주FC가 지난해 7월부터 월드컵보조구장을 리모델링 한 광주축구전용구장을 홈 구장을 옮기면서 사실상 '주인 없는 집'이 된 것이다. 시민들의 여가 시설이란 명분 아래 적자가 용인됐던 경기장에서 프로축구마저 열리지 않게 되면서 존재의 이유마저 잃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광주 구단이 4만245석 규모의 ‘큰 집(주경기장)’을 떠나 1만7석 규모의 ‘작은 집(축구전용구장)’으로 옮긴 가장 큰 이유는 기존 경기장이 ‘너무 커서’다. K리그 관중 규모에 비해 경기장이 워낙 커 경기 관람 시 몰입감이 떨어지는데다, 경기장과 관중석 사이에 육상 트랙이 깔려 있어 관람의 질 또한 낮아진다. 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결국 홈 구장의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결단한 것이다.
프로축구단의 '다운사이징'은 광주와 부산(2017년 1만2,349석 규모 구덕운동장으로 이전) 외에 인천, 대구에서도 있었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2012년 문학주경기장(5만1,237석)을 떠나 인천축구전용구장(2만300석)에 새 집을 마련했고, 2019년엔 대구FC가 대구스타디움을 떠나 시민운동장을 축구전용구장으로 리모델링한 DGB대구은행파크(1만2,172석)로 홈 구장을 옮겼다.
자연히 이들 지역 '월드컵 성지'들도 광주와 마찬가지로 축구팬들의 발걸음은 뚝 끊겼다. 축구국가대표팀 경기(A매치)나 육상대회 등 스포츠 이벤트보다 조용필 BTS 싸이 등이 나서는 초대형 공연 때나 북적인다. 그마저도 해마다 손으로 꼽을 정도다. 경기장 규모에 맞는 행사를 유치한 영업일수가 연간 10일도 되지 않는 해가 허다하다.
더 큰 문제는 경기장 노후화에 따른 유지보수비 상승이다. 나이가 들어가니 곳곳에서 ‘대수술’이 펼쳐지는데, 수술비는 영락없이 시민들 부담이다.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은 월드컵 직후인 2002년 8월 남해안을 강타한 태풍 루사, 이듬해 상륙한 태풍 매미의 영향으로 지붕막이 파손되며 세금을 축냈다. 경기장을 운영하는 부산 체육시설관리사업소 관계자는 “재작년까지 총 20장의 지붕막을 교체한 가운데, 지난해 9월 태풍 마이삭의 영향으로 9장의 지붕막이 추가로 파손된 상태”라고 전했다.
사업소 관계자에 따르면 지붕막 한 장을 교체하는 데 약 3억원의 세금이 책정되는데, 지난해 파손된 9장의 지붕막은 예산이 없어 교체 시기를 올해로 미뤘다. 개장 후 20년 동안 지붕막 교체에만 약 80억원 안팎의 세금이 투입되는 셈이다. 이 밖에도 전기 통신 기계설비 소방 모두 순차적으로 보수가 필요해 경기장 유지보수를 위한 추가 비용은 꾸준히 지출된다는 게 관계자 설명이다. 인근 상인 A씨는 “태풍 오면 또 찢어질 지붕막을 굳이 세금 들여 고칠 필요가 있겠느냐”며 “지붕막이 아니라 경기장 전체가 없어져도 신경 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구장들도 경기장 보수에 따른 굵직한 비용 지출이 이미 시작됐거나 예고돼 있다. 정보공개포털 자료에 따르면 인천시는 문학경기장 주경기장 및 보조구장 육상트랙이 노후화로 경기장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 2019년 20억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트랙을 교체했다. 광주광역시는 지난해 총 사업비 69억2,800만원 규모의 월드컵경기장 천장 및 지붕 개보수공사를 추진했다. 월드컵경기장 안전 진단 결과 관람석 천장 부위 방조망의 볼트와 너트 등이 노후돼 보수가 시급하다는 결과가 나온 게 추진 배경이다. 이와 함께 대부분의 경기장들은 개장 후 20년 사이 진행된 지구온난화로 경기장 잔디 교체 및 보수 주기가 단축돼 이에 따른 지출 확대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전문가들은 시작부터 잘못된 월드컵경기장 사후 활용 계획을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다시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김상철 나라살림연구소 연구원은 “설계 단계부터 월드컵이란 일회성 이벤트만 고려하고, 사후 활용은 뒷전이었던 게 가장 큰 원인”이라며 “향후 유지보수와 리모델링 등으로 상당한 세금이 투입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대책을 논의 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그는 “지을 때는 중앙정부 의지가 크게 반영된 사업이지만, 사후 활용은 지자체들 책임으로 떠넘겨진 상황”이라며 “중앙정부가 함께 해결책을 찾고 지자체와 공무원, 더 나아가 시민들도 경기장 유지보수에 들어갈 세금이 당연한 지출이란 인식을 깨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월드컵 성공개최로 재미를 본 대한축구협회의 책임감, 그리고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지자체장들의 과감한 결단도 요구된다. 강준호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스포츠산업연구센터 소장)는 “경기장을 지어 놓은 뒤부터는 안 쓰면 손해”라면서 월드컵 유산 활용에 대한 장기 전략 부재를 지적했다. 강 교수는 “현재 세금은 지속적으로 투입되고 제대로 활용은 되지 않는 최악의 상황”이라며 “(대회나 공연 유치 등)최대한 경기장을 많이 활용하는 방안을 지자체 차원에서 꾸준히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수익성을 따질 수밖에 없는 민간에 경기장과 부속 시설들을 위탁운영 하는 방안 등 지자체장들의 결단도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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