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 범위를 축소하고 처벌 수위를 낮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 정부 협의안의 '급발진'을 멈춘 건 국회에서 농성 중인 산업재해 유가족의 '브레이크'였다. 30일로 단식 농성 20일째로 접어든 산업재해 사망 유가족들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 회의장을 드나들며 '감시의 눈'을 치켜떴다. 여야가 쉽사리 정부의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중대재해 기준을 '2명 이상 사망'으로 상향시킨 정부안에 제동을 건 이는 비정규직 노동자 고 김용균씨의 모친 김미숙씨였다. 김씨는 29일 법안소위 회의장을 찾아가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지 몰랐다. 용균이도 (법안 적용 대상에) 빠져있다"고 호소했다. 법사위로 제출된 정부안은 중대재해를 '동일한 원인으로 또는 동시에 2명 이상 사망한 재해'로 규정하거나, 원안의 '1인 이상 사망'을 유지하되 형량을 낮추는 방안을 담았다. 이 경우 홀로 근무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김용균씨나, 혼자 스크린도어를 정비하다 사망한 구의역 김군 사건이 중대재해 범주에서 빠지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중대재해법이 '김용균 빠진 김용균법'이 된다는 김씨의 호소는 이날 법안소위 회의에도 영향을 줬다. 고용노동부는 '2인 이상 사망' 조항을 고집하지 못했고 야당도 여기 힘을 실어주지 않았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이 제출받은 29일 법안소위 속기록에 따르면, 박화진 고용부 차관은 "중대재해를 2명 이상 재해로 한정하는 것 자체가 조금 문제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후 여야는 별다른 이견 없이 '1인 이상 사망'으로 규정한 원안을 따르기로 결론을 냈다. 김씨는 30일에도 법안소위 회의장을 찾아 소위원장인 백혜련 민주당 의원에게 "그걸(원안 유지)로 인해서 처벌 하한을 낮출까 우려된다"고 재차 호소했다.
유족들은 그간 중대재해법 심사를 '보이콧'하다 뒤늦게 합류한 야당도 압박했다. 2016년 비정규직 방송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인권 문제를 고발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 이한빛 CJ ENM PD의 아버지인 이용관씨는 29일 법안소위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을 지목하며 "발목잡기 위해 들어왔다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임해달라"며 일침을 놓기도 했다.
야당도 이런 요구에 호응했다. 야당은 경영책임자의 범위에 지자체장과 중앙행정기관장을 제외한 정부안을 비판하며 이씨의 발언을 인용하기도 했다. 이씨는 법안소위에서 정부안을 조목조목 비판하며 "정부나 지자체도 노동자를 고용한다. 사용자로서의 책임과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은 이후 "주의 의무라고 부과되는 의무들은 정부의 일이다. 그래서 아까 유족들도 공무원, 지방자치단체장 처벌해야 된다고 했다. 그들 본인의 고유 업무를 안 했다는 거다"라고 했다. 여야는 30일 경영책임자에 지자체장과 중앙행정기관장을 원안대로 포함시키기로 합의했다. 또 대표이사라는 용어 대신 '사업을 실질적으로 총괄하고 안전보건의무를 지는 자'를 경영책임자로 규정하기로 했다.
유가족들은 여야가 임시국회 내 중대재해법 제정의 청사진을 그려오지 않는 한 단식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30일 밝혔다. 이에 여야 지도부도 임시국회 내 법안 처리 물꼬를 트기 위해 움직였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와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만나 중대재해법에 처리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이 대표는 "회기 내 합의 처리하자"고 제안했고, 김 위원장도 "정부안을 토대로 의원안을 절충해가자"며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다만 여야는 추가 심사를 위한 법안소위 날짜를 내년 1월 5일로 잡아 유가족의 농성이 그만큼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호진 정의당 선임대변인은 "단식하는 유가족을 죽이겠다는 것인지 묻고 싶다. 일하는 국회법을 통과시킨 민주당이 노는 국회를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