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인텔은 한 때 세계 반도체 시장의 절대강자로 군림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독점 공급하면서 세계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다. 하지만 PC에서 모바일로 변한 대세의 적기대응에 실패하면서 사세는 급격하게 기울고 있다. 급기야 반도체 생산마저 중단하라는 굴욕적인 처지로 내몰렸다.
30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서드포인트는 29일(현지시간) 인텔에 대대적인 구조개혁을 요구했다.
서드포인트는 최근 인텔의 주식 10억달러(약 1조1,000억원)어치를 확보했다. 댄 러브 서드포인트 최고경영자(CEO)는 인텔 이사회에 보낸 서한을 통해 "투자자문을 고용해 미래 대안 구상을 시작해야 한다"며 반도체 생산부문을 포기하는 등의 방안을 제안했다.
데이터를 처리하는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에서 압도적인 최강자였던 인텔은 최근 여러 차례 차세대 CPU 양산 시기를 늦추면서 시장에서 신뢰를 잃고 있다. PC용 CPU 양산 시기는 2022년 하반기로 6개월 이상 늦춰졌고, 서버용 CPU는 2023년 하반기로 1년가량 밀렸다.
인텔은 특히 10나노미터(100만분의 1미터) 이하 초미세 공정에서 제품을 생산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인텔의 최신 제품은 14나노로, 5나노 제품을 이미 생산하는 TSMC나 삼성전자에 크게 뒤진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CPU 경쟁사인 AMD에선 TSMC에 제품 생산을 위탁하는 방식으로 이미 7나노 기반 CPU를 선보이면서 이미 인텔 추격에 나선 상태다. 인텔과 AMD의 PC CPU 시장 점유율 격차는 5% 이내까지 좁혀졌다. 인텔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그동안 인텔 반도체에 의존해왔던 애플에 이어 마이크로소프트(MS)까지 자체 개발을 선언했다.
업계에선 인텔의 기술이 모바일 환경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기본적으로 PC와 서버에 최적화돼 있는 인텔의 설계 기술은 고성능을 구현하는 반면 전력 소비가 크다. 반면 애플, MS가 택한 영국의 반도체 설계 업체인 ARM의 설계 기술은 애초부터 저전력·고효율에 초점을 맞췄다. 이에 스마트폰, 사물인터넷(IoT) 등 항상 전원이 켜져있어야 하는 모바일 기기에 상대적으로 적합하다.
결국 인텔은 어렵지만 자체 생산 기조를 유지할 지, AMD처럼 위탁 생산으로 돌릴지에 대한 고민에 들어갔다. 인텔이 위탁생산 방식을 택할 경우 양산은 TSMC나 삼성전자가 맡게 될 전망이다.
기술력만 놓고 보면 TSMC가 앞선 것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TSMC는 인텔 애리조나 공장 인근에 최신 반도체 양산 공장을 건설하려는 계획도 발표한 바 있어 양 사가 이미 생산에 대해 합의를 이뤄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TSMC가 애플, AMD 물량을 소화하는데도 버거운 처지인 만큼 추가적으로 인텔 제품을 맡는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삼성전자도 최근 퀄컴, 엔비디아 등 대규모 수주 성과를 내면서 기술력을 입증받은 만큼 삼성전자와 물량을 나눌 수 있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경쟁자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란 말이 크게 와닿고 있다"며 "종합반도체 최강자인 인텔마저 양산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위탁생산에 강점을 보이는 TSMC와 삼성전자가 수혜를 크게 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