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근무 중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대구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할 간호사를 모집합니다.” 대한간호협회에서 온 문자메시지였다. 올 것이 왔구나,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평생 잊혀지지 않을 2020년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간호사 김성덕(42)이다. 대전보훈병원에서만 21년간 근무한 베테랑이지만, 아직 못 이룬 꿈이 있다. 아프리카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는 것이다. 왜냐고 물으면 ‘간호사라서요’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 때부터 틈만 나면 봉사활동을 했고, 간호사를 오래 한 이유도 봉사할 기회가 많아서였다.
다른 직종에서 보면 이해 못할 수 있겠지만, 간호사들 중엔 봉사를 해보고 싶어 이 직업을 택했다는 이들이 많다. 병원 입사 동기인 남편도 그렇다. 그런데 이 남자는 결혼 후에 몇 번이나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나도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 아이 엄마라 늘 막판에 주저앉곤 했다. 그 사이 아이들이 제법 컸다. 더구나 대구는 신천지발(發) 집단감염으로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드디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가족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감염병 확산 초기라 병에 대한 '정보'보다 '공포'가 더 많았던 때다. 일주일 내내 설득했다. “엄마 같은 사람이 안 가면 이상하지.” 17살 큰딸이 가장 먼저 엄마 편을 들어줬다.
3월 8일 일요일 밤 다른 간호사들과 대구로 갔다. 숙소인 모텔에 짐 풀고 누웠는데, 자정이 지나도 앰뷸런스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정말 심각하구나, 바짝 긴장됐다. 다음날 아침 일찍 대구동산병원으로 갔다. 대중교통은 위험하다 해서 15분을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본 대구는 유령도시였다. 월요일 아침이었는데 사람도, 차도 보이지 않았다.
대구동산병원은 환자가 대규모로 발생하자 급히 마련한 코로나19 전담병원이었다. 간단한 교육을 마치고 바로 중환자실에 투입됐다. 5~6년 중환자실에 근무한 경력 덕분에 가장 힘든 곳에 배정된 것이다. 말이 중환자실이지 아무런 장비도 갖춰져 있지 않았다. 환자복이 없어서 부직포를 급히 둘러둔 환자도 눈에 띄었다.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 병원도 차츰 시스템을 갖춰 나가기 시작했다. 각지에서 온 간호사들은 누가 뭐랄 것 없이 제 일을 찾아갔다. 나는 막내 간호사 역할을 자청했다.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주고 식사를 챙기고 가래를 뽑아줬다. 코로나19 확진자들 대부분은 설사를 했다. 방호복을 입은 채 하루에 수십 번씩 대소변을 치웠다.
중환자실에선 매일 사람이 죽어서 나갔다. 아침에 반갑게 인사했던 어르신이었는데, 오후엔 인공호흡기를 달더니 다음날 숨을 거두는 식이었다. 증상이 호전돼 퇴원한 사람은 한 명밖에 못 봤다. 버텨내는 환자들은 숨쉬기가 너무 힘들다며 괴로워했다. 이게 보통 감염병이 아니구나, 실감이 났다.
일주일 뒤엔 일반 병실로 이동했다. 50개 병상에 고령인 환자가 대부분이었고, 치매가 있는 환자들까지 섞여 있었다. 한번은 약을 거부하고 도망가는 치매 환자를 방호복 입은 채 쫓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기도 했다. 숨쉬기조차 어려웠다.
방호복을 벗고 싶었지만 교대해줄 사람이 없었다.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마스크를 살짝 들었다. 순식간에 방안의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감염관리실을 찾았더니 “그 정도론 감염되진 않을 거예요”라고 안심시켜줬다. 안도하면서도 못내 찝찝했다.
2주 간의 대구 생활을 마치고 향한 곳은 대전이 아니라 전북 장수였다. 대구로 가기 전 부모님 댁 근처의 시골 빈집을 미리 물색해뒀다. 2주간 자가격리를 위해서였다. “나 대구 다녀왔으니까 가까이 오지마.”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말했다. “이것아, 거기가 어디라고 가.” 깜짝 놀란 엄마를 뒤로 하고 빈집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사람이 드문 동네라 혼자 산책도 하고 가끔 산에도 올랐다. 일주일 지나니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찼다. 침이 안 넘어갈 만큼 목이 부었다. 장수의료원을 찾아 두 번째 진단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음성. 감기겠거니,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 뒤 사흘째에야 내가 냄새를 못 맡는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검사를 받았다. 2주간의 자가격리를 끝내는 날, 결과가 나왔다. 양성.
가장 먼저 생각이 난 건 엄마였다. 아무리 나 근처에는 절대 오지말라고 화를 내도, 엄마는 매일 방문 앞에 따뜻한 밥과 찌개를 놓고 갔다. 어쩌다 한번 음식을 직접 건네 받았는데, 그 때 아무래도 손이 스친 거 같았다. 다행히 엄마는 나중에 음성이 나왔다. 하지만 앰뷸런스를 타고 전북대병원으로 출발할 때, 차창 밖으로 마주친 엄마의 눈길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입원하니 '코로나19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다 확진 판정을 받은 간호사'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연락이 끊긴 친구들도 전화를 걸어왔다. 가장 큰 위로가 된 것은 강정화 간호사였다. 나처럼 대구에 갔다 감염된 분인데, 마침 또 같은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고 처음 만나 “선생님이 계셔서 큰 위안이 됐어요”라 했더니 같은 말이 돌아왔다.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낸다.
증상은 차차 나아졌다. 일주일이 지나니 전신통이 사라졌고, 후각도 조금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래도 쉽게 음성 판정이 나오진 않았다. 입원 기간이 길어지니 너무 힘들어 의사선생님을 붙잡고 몇 번을 울었다.
5월 24일 다시 가족들을 만났다. 43일간의 입원을 마치고, 다시 장수에 가서 일주일간 격리를 끝낸 뒤였다. 그 사이 세 아이는 훌쩍 커 있었다. 10살 막내 아들은 학교 선생님이 “너네 어머니 대단하신 분이다”라고 했다고 자랑을 했다. 석 달 가까이 엄마의 빈 자리를 메우느라 집안일까지 도맡은 남편은 요리 실력이 부쩍 늘어 있었다. 아직도 냄새를 잘 못 맡아 음식을 태우기도 하지만, 다시 찾은 일상에 하루하루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왜 코로나에 걸렸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한다. 참다참다 마스크를 올렸던 그 한 순간이 가장 후회스럽다. 돌아보면 당시엔 너무 의욕이 앞섰다. 나는 대구에 있어봐야 2주인데 동산병원 간호사들은 계속 있어야 한다, 그러니 잠시도 쉬지 말고 궂은 일이란 일은 내가 다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민망하고 죄스럽다. 대구에서 만난 간호사들 중에선 병원에서 보내주질 않아 사표를 쓰고 달려온 분도 있었다. 대구에서 자기 병원으로 되돌아간 뒤에 자가격리조차 못하고 출근했던 분들도 많다. 나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에서도 사명감 하나로 최선을 다해주신 분들이다.
민망하고 죄스럽지만 내가 나서는 이유는 단 하나다. 아직 전국 곳곳엔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는 간호사들이 너무나 많다. 하루가 다르게 환자가 늘어나는데, 해가 바뀐다고 금세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환자들은 물론, 간호사들도 언제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 새해엔 코로나19가 없는 세상이 되길 간절히 기대한다. 국민 모두의 힘이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