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40대 여성 A씨의 월급은 180만원 남짓이다. 결근 한번 없이 10년을 한 직장에서 내리 일했지만 승진은 없었다. 계약서에 없는 잡무까지 떠안아야 하지만, 문제를 삼을 때마다 돌아오는 답은 같다. “아쉬우면 그만두세요. 들어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많으니.” 이처럼 열악한 처우가 ‘당연시’되는 이유는 하나다. A씨가 ‘결혼 이주 여성’이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A씨의 고용주는 ‘정부’다. 여성가족부 산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일하는 ‘통번역 지원사’들은 같은 직장에서 같은 시간, 비슷한 일을 하는 내국인 직원들에 한참 못 미치는 처우를 받는다. 결혼 이주 여성의 안정적 자립을 돕기 위해 설립된 정부 기관에서 외려 이들을 ‘차별’하고 있는 꼴이다.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정부 기관에서 일하는 이주여성들을 만나 ‘고용차별’의 내력을 들여다봤다.
직장 생활 10년차를 훌쩍 넘긴 중국 출신 이주 여성 장모 씨는 수도권의 한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통번역 지원사’로 일한다. 한국어가 서툰 이주여성들을 위해 그들의 귀와 입이 되어주는 일이다.
계약서에 명시된 장씨의 업무는 ‘내국인과 이주여성 간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지만, 마음 붙일 곳 없는 이주여성들에게 장씨는 ‘해결사’로 통한다. “사실 ‘단순 통역’이라기 보다 상담에 가까워요. 가족간의 내밀한 갈등을 듣다 보면 밤을 꼴딱 새워 통화할 때도 많고요.” 특히 가정폭력으로 경찰까지 출동하는 상황에선 장씨의 역할이 더 막중하다.
모국어로 쏟아진 고통과 원망의 말들을 건조한 타국의 언어로 걸러내는 일은 매번 새롭게 버거운 일이다. “한때 같은 처지였고, 또 한번씩은 겪어보았던 일이잖아요. 그러니 그 고통에 더 깊이 이입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장씨와 같은 통번역 지원사들은 우울증을 감기처럼 달고 산다.
10여 년 전 장씨의 첫 기본급은 100만원이었다. 세금과 교통비, 식비를 제하고 나면 수중에 남는 돈은 70만원 남짓. “급여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어요. 저와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죠.” ‘언니, 고마워요’라는 말 한마디가 쌓여 매일 일터로 나설 동력이 됐다.
그렇게 일한 세월이 10년. 경력으로만 따지면 ‘과장급’에 가깝지만 장씨는 여전히 1년 단위의 계약직 사원이다. ‘한국인이 되면 일한 만큼 대우받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으로 귀화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4년 전 최저임금 폭이 가파르게 오를 당시엔, ‘1시간 늦게 출근하고, 1시간 일찍 퇴근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다. 육아와 직장일을 병행하는 직원들을 ‘배려하는 차원’이라 포장했지만, 실상은 임금 인상을 막기 위한 꼼수였다.
장씨는 누적된 우울로 몸과 마음이 망가진 지 오래라고 말한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터에서조차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거,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를 무너뜨린 것은 통장에 찍힌 액수가 아니라, 차별이 상식처럼 여겨지는 현실이었다.
한국살이 14년차 몽골 출신 이주 여성 마잉바야르(38)씨는 7년 전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이중언어강사’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몽골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후, 호텔 매니지먼트일을 했었어요. 한국에 올 때 외국인 노동자들이 흔히 선택하는 직업을 갖고 싶지는 않았어요.” 고국에서 사회생활을 해온 그는 한국에서도 ‘전문성’ 있는 일자리를 원했다.
이중언어강사 제도는 2009년 도입됐다. 전문교육을 받은 고학력 결혼 이주 여성들을 강사로 채용해, 공교육 현장에서 중도입국 학생들의 학업을 돕거나 ‘다문화’에 대한 기본지식을 가르치게 하는 제도다. 2011년,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2년 내 이중언어강사 수를 3배 가까이 늘리겠다며 전문 교육과정을 개설했다. 나라가 직접 나서 일자리를 보장해 준다니, 마잉바야르씨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선택지였다.
선생님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시댁의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경인교대의 교육과정에 지원했다. 1년간 왕복 5시간에 달하는 거리를 통학하며 열심히 배웠다. “아들이 아직 어릴 때라서 죄책감도 컸지만, 이 시기만 잘 견디고 나면 안정적인 일을 하며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버텼죠.”
맞닥뜨린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학교에선 딱 10개월 단위로만 계약을 해요. 시간제 강사였죠. 계약이 연장되지 않고 종료되면 그대로 실직이었어요. 어쩌다 보니 3년을 쉬기만 했죠.” 2014년까지 전국에 600명 이상 늘리겠다는 정부의 계획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2019년 교육부가 더불어민주당 신경민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다문화 학생 수는 약 14만명으로 급증했지만, 전국의 다문화 언어강사는 489명에 그쳤다. 7년간 두 배도 늘지 않은 셈이다.
마잉바야르씨는 그간 요양보호사와 의료 코디네이터 등 자격증을 여러 개 땄지만 소용이 없었다. 후발주자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이주 여성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배우는 건 어렵지 않죠. 문제는 언제나 그다음이에요. 교육에만 예산을 다 쓰고, 정작 일자리는 만들지 않으니 그저 ‘보여주기’식일 뿐인 거죠.”
한국 사회가 이주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도움은 베풀면서, 결코 동등해질 수는 없는 존재’로 여긴다. 동정과 시혜의 대상일 뿐, 똑같은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참아주지 않는다.
지난달 17일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이주여성 노동자들은 ‘이주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 차별은 합리적 이유가 없는 차별’이라는 내용의 진정을 국가인권위원회에 냈다. 이들은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열악한 임금 △1년 미만의 쪼개기 계약 △승진 기회 없는 업계 구조 등을 바로잡아달라고도 요구했다.
진정 대리인인 이주민센터 친구의 이진혜 변호사는 “정부가 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운영 지침에서 ‘특성화 사업’과 ‘기본 사업’을 분리한 것 자체가 이주여성과 내국인의 처우를 달리 적용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지적했다. 해당 일자리를 설계할 때부터, '1년짜리' 단기 인력 고용으로 비용을 최소화하려 했다는 것이다.
누구든 출신이나 성별,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에 따라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곳. 장씨와 마잉바야르씨는 한국을 ‘그런 나라’라고 생각했다. 이주 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들이 생각하는 한국은 다른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