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의 격랑은 강단 학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후 사회과학이 전거(典據)처럼 떠받들던 '구조기능주의'의 빛이 바랬다. 사회 구조(Structure)가 하위 체계(subsystem)의 기능적 조화로 통합-존속하고, 혁명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하며, 차별-불평등도 '기능적'으로 불가피해서, 갈등도 구조적 모순이 아닌 일시적 일탈에 불과하다는 관점. 그 분석틀은 60년대 세대에겐 가당찮은 거였다. 반발로 나타난 이른바 신사회운동은 갈등이론과 마르크스주의, 현상학 등 방법론적 다원주의를 낳았다. 황혼녘에나 날개를 편다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들, 즉 철학계도 그 변화에 무심할 순 없었다. 적어도 일부는 전통적 형이상학과 비트겐슈타인류의 언어-분석철학의 소파에서 벗어나 격렬한 현실적 질문들, 구체적 사회윤리의 문제를 살피기 시작했다.
서든캘리포니아대 철학교수 마셜 코헨 등이 1971년 철학과 법학, 사회과학 진영의 학술-시사 계간지 '철학과 공공 의제(Philosophy & Public Affairs)'를 창간했다. MIT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Judith Javis Thomson)이 에세이 '낙태에 대한 옹호(A Defense of Abortion)'를 발표한 게 그 잡지 가을 창간호였다. 낙태의 윤리적-논리적 정당성을 밝힌 거의 최초의 철학적 고찰로, 낙태 윤리이론의 고전이 된 논문급 에세이였다.
톰슨은 당시 낙태 반대론자들의 전제, 즉 수정 직후 혹은 일정 기간 이후의 태아를 생명권의 주체로 상정해 낙태를 살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미끄러운 경사면 논변(Slippery slope argument)'의 오류라며, "(도토리를 임의적 어느 시점부터 참나무라 부른다고 해서) 도토리가 참나무가 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전(前) 인간- 인간'의 기준을 정하는 데 회의적이었다. 소모적 논쟁을 중단하기 위해 그는, '대폭 양보해서' 수정된 순간부터 태아를 사람이라고 쳐주더라도 어떤 경우 낙태는 허용될 수 있다는 주장의 윤리적-논리적 정당성을 입증했다. 저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비유'가 거기 등장한다. 대충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치명적 신장 질환을 앓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를 살리기 위해 '음악애호가협회'가 수많은 이들의 의료정보를 조사해 거부반응이 없는 유일한 사람인 '당신'을 찾아낸 뒤, 당신이 잠든 사이 바이올리니스트의 순환계를 당신의 몸에 연결해버렸다는 가정. 당신의 신장이 바이올리니스트의 혈액 독소를 중화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 그의 몸을 떼어내면 그는 죽는다. 그가 병에서 낫게 될 9개월 동안 그 상황을 감내하는 게 당신의 도덕적 의무인가? 당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은 물론 당신에게 있지만, 생명권이 더 중하므로 관을 뽑아선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걸 법으로 강제할 수 있는가?
임신의 비유로 본다면 당신이 처한 상황은 강간 임신과 유사하다. 톰슨은, '그 경우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한다면, 강간으로 수정된 태아(사람)의 생명권은 다른 사람의 생명권보다 가벼운가' 라고 다시 묻는다. 나아가 톰슨은, 산모 목숨이 위험한 경우, 강간은 아니지만 원치 않는 임신을 한 경우 등 상황별 낙태의 정당성을, '환기하려고 열어둔 창문으로 절도범이 들어왔다고 그에게 집을 사용할 권리가 있는가' 등의 천재적 비유와 논리로 입증해 보였다. "내가 죽을 만큼 아픈데, 열이 나는 내 이마를 짚어줄 헨리 폰다(미남 영화배우)의 시원한 손길만이 내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비유도 등장한다. 톰슨은 폰다가 '나'를 살리기 위해 먼 길을 와준다면 정말 친절한 일이겠지만 그걸 정당한 권리로 요구할 수는 없으며, "어떤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타인의 생명을 지속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르기를 도덕적으로 요구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썼다.(책 '낙태에 대한 옹호', 전기가오리) 톰슨은 낙태에 대한 전면 반대가 옳지 않듯이, 전면 허용도 윤리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여겼다. 임신 7개월인 산모가 해외여행을 가려니 '성가셔서' 낙태를 원하는 경우 등 "우리가 그 이하로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 한 편의 에세이가 '태아의 지위'를 둘러싼 낙태 논쟁의 돌파구를, 여성(산모)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계기를 열었고, 미 연방대법원은 2년 뒤인 73년 '로 v. 웨이드(Roe v. Wade)' 판결로 임신 6개월 이내 낙태의 헌법적 권리를 인정했다. 톰슨은 낙태 말고도 안락사 등 현실적 난제의 윤리적 해법을 모색하며 저술과 강연-강의를 통해 사회에 값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당시로선 드문 여성 철학자로서, 학문-학계의 젠더 벽을 허무는 데도 기여했다.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 11월 20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톰슨은 윤리 및 실험 철학과 심리학 등의 하위분야로 자리잡은, '트롤리학(trolleyology)'이란 사고실험분야를 개척한 주역으로도 유명하다. 트롤리 딜레마는 영국 옥스퍼드대 여성 철학자 필리파 풋(Philippa Foot, 1920~2010)이 1967년 '옥스퍼드 리뷰'에 발표한 에세이 '낙태 문제와 이중효과의 원리 The Problem of Abortion and the Doctrine of the Double Effect'에 처음 썼다. '열차가 계속 달릴 경우 다섯 명이 치여 죽지만 선로를 지선으로 바꾸면 한 명만 죽는 상황이라면, 또 당신이 기관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 풋은, 무고한 한 명에게 사형을 선고하지 않으면 인질 다섯 명을 죽이겠다는 협박을 받은 판사의 딜레마와 기관사의 딜레마를 대비했다. 두 경우 모두 1명과 5명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문제이고, 공리주의(최대 다수의 행복)와 결과주의(Consequentialism, 가장 좋은 결과를 낳는 행동이 최선이라는 윤리이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선택도 같아야 하지만, 전자(기관사)는 5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의 '예견'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적극적 '의도'로 1명을 죽이는 것이란 점에서 윤리적으로 다르다고 풋은 주장했다. 즉 소극적 의무(해치지 않을 의무)와 적극적 의무(목숨을 구할 의무)가 충돌할 때 소극적 의무가 우선하며, 직관적으로도 윤리적 호소력이 더 크다는 거였다. 그는 광의의 낙태 찬성론자였지만, 태아의 생명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로 낙태 허용 여부가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무신론자인 풋은 종교계(가톨릭계)가 낙태에 반대하며 전가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던 '이중효과의 원리'를 우회하고자 저 비유를 동원했다. 중세 신학자 아퀴나스에게서 비롯된 신학적 기준인 '이중효과'란,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할 경우 그 의도가 자기방어에 있지 살인에 있지 않으므로 도덕적으로 허용된다는 논리다. 반면에 낙태는 의도적 살인이므로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었다. ('저 뚱뚱한 남자를 죽이겠습니까?', 데이비드 에드먼즈, 이마)
에드먼즈는 "필리파 풋은 트롤리학이 굴러가게 만들었지만, 트롤리학을 최고조로 달리게 만든 사람은 MIT 철학자 주디스 자비스 톰슨이었다"고 책에 썼다. 톰슨은 76년과 85년 두 편의 논문으로 '트롤리 딜레마'를 더욱 정교한 사고 실험에 응용했다. 선로 변경의 선택적 책임이 기관사가 아닌 구경꾼에 있다면 어떨까(그림 1), 5명에게 돌진하는 트롤리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난간의 '뚱보(fat man)'를 던져 선로를 막는 방법밖에 없다면 당신은 어쩌겠는가(그림 2), 또 만일 직진 선로에 5명이 묶여있고 우회해 되돌아오는 루프(loop) 선로에 뚱보가 묶여 있다면?(그림 3) 톰슨은 풋의 구분, 또 '이중효과의 원리'가 분별한 '의도'와 '예견'의 도덕적 차이를 의심하기 위해 저 실험들을 고안했다. 톰슨은 루프선의 선로를 변경하는 것은 뚱보의 죽음을 '예견'한 것이 아니라 '의도'한 것이지만, 다섯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풋의 지선 변경 사고 실험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톰슨 이후 트롤리학은, 그의 메시지와 무관하게, 하나의 윤리-논리학 방법론으로, 정치-경제-사회-심리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활발하게 응용됐고, 영화 등 대중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톰슨은 1929년 10월 4일 미국 뉴욕 맨해튼의 유대인 랍비 혈통 이민자 부모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보적 대학인 '뉴스쿨(New School)의 재무 담당자였고 어머니는 영어 교사였다. 그는 6세 때 어머니를 암으로 잃고 의대 진학을 결심했다가 암기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아 포기했다고 한다. 우연히 읽은 18세기 철학자 조지 버클리(1685~1753)의 관념론 대화록('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의 현란한 논리에 매료된 게 철학을 택한 계기였다. 그는 세계 최고(最古)의 사립 여대로 여성운동가 애니 메이어가 1889년 설립한 뉴욕 맨해튼의 바너드 칼리지(Barnard College)를 1950년 졸업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대 철학과에서 2년간 수학했지만 당시 영국, 특히 캐임브리지는 교수였던 비트겐슈타인 철학의 독무대였고, 그는 거기 정을 붙이지 못했다. 두 번째 학사 학위만 받고 귀국해 광고회사에 카피라이터로 취직했지만 그 역시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우연히 대필작가로 일하게 되면서 시간 여유를 갖게 된 그는 54년 컬럼비아대 대학원에 진학, 석사(56년)와 박사(59년) 학위를 땄다.
2012년 미국철학회(APA)가 주최한 '존 듀이 강연'에서 그는 성차별이란 걸 "컬럼비아대에서 처음, 노골적으로 경험했다"며 "당시 철학과 학과장은 입학원서를 낸 내게 '철학 자체를 즐기는 데 만족하길 바란다'며 '철학과는 비서가 아닌 한 여성을 채용하지 않으며, 강사 추천서도 기대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보란 듯 길 건너 그의 모교 바너드대 조교수로 60년 임용됐다. 당시 바너드대는 페미니스트들의 거점이자 전초기지였다.
톰슨은 철학개론 강의를 시작하면서, 바너드 학생들의 현실적인 질문과 요구를 접하면서, 형이상학의 후미진 분과였던 '윤리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64년 MIT로 옮겨 2004년까지 재직하며, 92~93년 미국철학회(APA) 회장까지 지냈고, 인권-윤리-철학과 관련한 수많은 상을 탔다.
톰슨은 '정의론'의 존 롤스, 옥스퍼드대- 예일대의 법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 자유-평등주의 이론의 대가인 뉴욕대 토머스 네이글,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로버트 노직 등 미국 중도-진보 철학계의 스타들과 어깨를 겯는 도덕철학자로 맹활약했다. 존 롤스의 강력한 비판자인 하버드대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비아냥 어린 표현을 빌자면, 그는 '리버럴 정치철학계의 드림팀' 중 한 명이었다. 의사조력자살을 둘러싼 뉴욕주와 캘리포니아주의 연방대법원 재판이 진행되던 1997년 4월, 대법원에 '개인의 권리'를 옹호하는 요지의 자문보고서를 제출한 철학자 6명 중 한 명이기도 했다. 드워킨은 보고서 서문에 "모든 개인은 비이성적이거나 그릇된 정보에 근거했거나 강압 또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내린 판단이 아닌 한, 국가의 간섭없이 자신의 종교적, 윤리적 확신에 따를 자유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썼다.
제자 대부분은 톰슨을 무자비하리만치 엄격한 교수로 기억한다.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가 된 엘리자베스 하먼(Elizabeth Harman)은 "MIT 철학도라면 주디(주디스)를 만나고 나온 급우를 격려하는 게 일이었다"며 "명료하고 환상적이면서 통찰력 있는 철학의 대가가 당신(우리)에게 같은 수준의 명료함을 요구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고 말했다. 톰슨이 제자들의 리포트에 긋던 가로줄(horizontal line)도 MIT의 전설 중 하나였다. 줄 곁에는 으레 '엉망이다(badly written)' '이 밑으로는 뭔 말인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읽다 말았다' 등의 코멘트가 달려 있곤 했고, 리포트 첫 장에 줄이 그어진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고, 역시 제자인 아이슬란드대 철학 교수 올라뷔르 파우들 욘손(Ólafur Páll Jónsson)은 전했다. 암기는 죽어라 싫어했던 그는 트롤리 딜레마 같은 복잡하고 정교한 사고실험은 "사랑스럽고, 끔찍하게 난해해서(lovely, nasty difficulty)" 좋아했다.
풋은 톰슨의 '바이올리니스트 비유'에 동조하지 않았다. 불치의 바이올리니스트와 태아를 대등한 존재로 둘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지만 풋도 톰슨도 당대 철학의 '주관주의' 즉, 도덕의 객관적 보편적 진리같은 건 없다는 상대주의에 맞서, 절대다수의 윤리적 직관에 부합하는 도덕적 기준과 원칙이 있다고 믿었고, 또 찾고자 했다. 다만 톰슨은 풋이 낙태문제에 한해 주관주의(상대주의)로 물러선 것과 달리, 태아의 생명권과 무관하게 '어떤 조건'에서 낙태는 허용돼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톰슨은 영국 철학자 제임스 톰슨(James Thomson, 1921~1984)과 62년 결혼해 80년 자녀 없이 이혼했고, 독신으로 지내다 전 남편 곁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