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신작은 잇따라 개봉을 미루고 있다. 영업시간은 밤 9시까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탓에 요즘 국내 극장가는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다. 상업영화로는 할리우드 대작 ‘원더 우먼 1984’가 유일하게 크리스마스 극장가를 찾는다. 대목이라는 수식이 무색한 연말, 그나마 시네필들에게 위안이 될 소식이 있다. 유럽 예술영화 ‘썸머 85’와 ‘운디네’가 24일 나란히 개봉한다. 둘 다 엇갈린 사랑의 서글픔을 그린다. 유럽 영화의 저력을 새삼 실감케 하는 작품들이다.
‘썸머 85’는 청춘의 위태롭고 가슴 시린 사랑을 그린 영화다. 요트가 전복돼 죽을 뻔했던 소년 알렉스(펠릭스 르페브루)가 자신을 구해준 다비드(뱅자맹 부아쟁)와 인연을 맺으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알렉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안 일을 돕던 어른스러운 다비드에게 의지하게 되고, 우정은 농밀한 관계로 나아간다. 한 소녀가 둘 사이에 끼어들면서 6주간의 사랑은 어긋나고, 예고된 파국이 닥친다.
영화 도입부부터 전개될 비극을 미리 알린다. 깜짝 놀랄 반전은 없다. 이야기보다 청춘의 방황과 빛나는 사랑, 질투, 성장통에 초점을 맞춘다. 사랑을 위해 갖은 금기를 허무는 젊음이 애틋하다. 거친 질감의 화면 등으로 1980년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깨우는 영상이 아름답다.
에이던 체임버스의 소설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밑그림 삼았다. 영국이 배경인 원작과 달리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감독은 프랑수아 오종. 요즘 프랑스 영화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시트콤’(1988)으로 데뷔한 이래 도발적인 연출로 영역을 넓혀왔다. ‘8명의 여인들’(2002), ‘영 앤 뷰티풀’(2013), ‘두 개의 사랑’(2017), ‘신의 은총으로’(2019) 등으로 국내 팬층을 키워왔다. ‘썸머 85’는 올해 칸국제영화제 초청작이다. 칸영화제는 코로나19로 행사를 취소한 대신 초청작 57편을 발표했다. 15세 이상 관람가.
‘운디네’는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독일 영화다. 주인공 운디네(파울라 베어)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여자다. 남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떠나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운디네는 실연 직후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라는 남자를 운명처럼 만나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그리스 비극처럼 뒤틀린다. 크리스토프에게 불운이 다가오고, 사랑은 종착역을 향한다.
독일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도시 괴담과도 같은 영화다. 전설 속 운디네는 물의 여인으로 인간을 사랑했다가 배신당하고 호수로 돌아간다. 영화는 전설처럼 초자연적인 비극을 그린다.
베를린과 교외를 배경으로 한 영상은 인위적이지 않아 아름답다. 운디네와 크리스토프가 물속을 유영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영상에 조응하는 서정적인 음악 역시 좋다. 영원할 수 없는 사랑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가슴이 먹먹해질 영화다.
파울라 베어는 이 영화로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신작이다. 펫졸트 감독은 독일 영화의 간판 중 한 명이다. 2012년 ‘바바라’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받았다. 12세 이상 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