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1887~1910)은 '을사늑약'의 주역인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암살하려 한 독립운동가다. 그는 1909년 12월 22일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서울 명동성당(당시 종현천주교회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던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 등을 3차례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힌 뒤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10월 26일)한 직후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그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판사를 꾸짖으며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라 주장했고, 사형이 확정된 뒤에는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듬해 9월 30일 경성감옥(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처형됐다. 향년 24세.
이재명의 칼에 숨진 이는 따로 있었다. 성당 앞에서 우연히 이완용을 손님으로 만난 만 44세 인력거꾼 박원문이었다. 그는 그날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에, 먹고 살자고 인력거를 둔 불운 때문에 목숨을 잃은 평범한 노동자였다. 아마 가족도 있었을 것이다. 재판에서 이재명은 "무지무능한 저 가련한 노동자를 일부러 죽이려고 했겠는가"라고만 주장했고, 사학자 박노자는 2007년 칼럼 '정당한 폭력은 정당한가'에서 정당한 폭력도 정당화할 수 없는 근거의 하나로 이 에피소드를 들었다. 박노자는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한 박헌영의 말, 즉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는 극소수의 폭력에 의한 운동은 필히 패배한다"는 주장도 인용했다. 다만 윤봉길 안중근 이재명 등의 '의거'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의 계기가 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했던 건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폭력이 정의에 기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하지만 결론은 마찬가지다. 정의가, 폭력이 효용가치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이재명 항목이 박원문을 철저히 지운 것도, 따라서 떳떳한 짓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