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선거에서 참패한 미국 공화당은 이듬해 3월 '부검(autopsy)'이라는 자아비판서를 발표했다. 오바마 연대를 깨고 백악관을 탈환하려면, 유색인종, 여성, 청년층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고 진단했고, 이민정책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2016년 대선에 출마한 공화당 다른 후보들이 '부검'의 진단과 권고를 따를 때, 트럼프는 반대로 갔다. 외연을 확장하는 대신, '분노에 찬 보통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세계화의 그늘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삶의 불안정을 느끼는 중서부 지역의 백인, 남성, 저학력자가 그들이었다. 클린턴을 엘리트 기득권의 대변자, 뉴욕금융가의 앞잡이로 몰아치면서 이민, 무역, 중국, 범죄, 총기, 이슬람 이슈를 던졌다. 그리고 이겼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트럼프는 재선에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경제는 2~3%의 견조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고, 2019년 실업률은 1969년 이래 가장 낮은 3.6%를 기록했다. 4년 전 트럼프를 지지한 유권자 대부분이 이번에도 그를 지지했다. 숫자로만 보면, 2016년보다 오히려 1,100만표가 많은 7,400만표를 얻었다. 바이든도 사상 최다득표를 했지만, 트럼프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가 문제였다. 트럼프는 대응에 실패했고, 그래서 졌다. 도시 외곽에 거주하는 고령의 중산층 공화당원 상당수가 바이든 지지로 돌아선 것이 주된 패인이었다. 대규모 집회가 불가능해지자, 대중과 직접 교감하는 트럼프의 강점도 살릴 수 없었다. 그 틈을 타고 민주당은 중서부와 플로리다에서 3대 1 비율로 압도적인 선거자금을 방송 광고에 쏟아부었다. 선거 막바지에 트럼프 스스로 코로나에 감염된 것은 엎친 데 덮친 불운이었다. 단, 이번 공화당 이탈자들이 완전히 민주당으로 건너간 것은 아니었다. 대통령선거에서는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의회 선거에서는 공화당 지지를 거두지 않았다. 이탈은 한시적이며,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다음 번에는 공화당 지지로 돌아올 것이다.
트럼프의 재임은 4년에 그치지만, 공화당, 나아가 미국 정치에 남기는 영향은 클 것이다. 트럼프 집권 4년 동안 공화당은 '부유한 10% 엘리트보다 나머지 90% 편에 서는 정당'으로 자리매김 해왔다. 자유무역에 반대하고, 군사적 대외팽창도 지지하지 않는다.
코로나19로 미국과 세계의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다. 세계경제포럼(WEC)에 따르면, 기업인 80%가 앞으로 디지털화를 가속하고 원격근무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생산성이 높아지는 데 따라 실업률도 높아질 것이다. 지난 30년의 세계화가 10대 90의 불평등을 만들었다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는 1대 99의 구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들의 지지 없이는 집권을 꿈꿀 수 없다.
90%의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던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체성이 바뀌고 있다. 한때 소외계층을 대변한 민주당이지만, 지금은 미국의 10대 부자 도시를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50대 부자 도시 가운데 40개가 민주당 지역이다. 뉴욕금융가와 실리콘밸리도 마찬가지다.
2022년 중간선거와 4년 뒤 대선을 생각하면, 바이든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 코로나19가 물러난 다음, 민주당은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넘어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못하면, 트럼프가 끌어낸 90%의 정치는 앞으로 위력이 더 거세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 이후 자유주의의 퇴조는 세계정치의 화두가 되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으로 이 흐름이 단번에 역전될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