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의석수 때문에?...'취지' 퇴색하는 필리버스터

입력
2020.12.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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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 다시 제도화 한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21대 첫 정기국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174석 거대여당에 맞서 103석의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꺼내 든 카드다. 필리버스터는 다수당이 수적 우세를 이용해 법안을 밀어붙일 때, 소수당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수단이다. 여야간 의석수 차이가 벌어진 이번 정기국회에서 기대감을 더 키웠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애초의 의미와 취지가 퇴색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①'소수 정당 의견 개진' 취지 무시하고 강제종료


2012년 재도입된 필리버스터가 본격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16년 테러방지법 때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를 이용해 당시 여당이었던 새누리당(현 국민의힘)이 밀어붙인 테러방지법의 문제를 조목조목 비판했다. 법안 저지에는 실패했지만, 필리버스터가 민주주의 체제에서 소수야당에 왜 필요한 제도인지 공감시킨 계기가 됐다.

2016년 필리버스터 때는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이 자체 종결하기 전까지 여당은 이 모습을 지켜봤다. 하지만 올해 정기국회에서 여당이 된 민주당은 이를 지켜만 보지 않았다. 압도적 의석수를 가진 민주당이 강제종결 조항을 꺼내들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174석의 민주당은 범여권 성향 소수당과 무소속 의원들을 설득해 지난 13, 14일 본회의에서 필리버스터를 강제 종결시키고 원하는 법안을 처리했다. "'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동의'라는 종결기준 자체가 발언권을 최대한 보장하라"는 야당의 주장이 필리버스터 종결 조항의 취지에 가깝지만, 거대여당이 이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②'맞불'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기본 가치 어긋나


다수 여당이 적극적으로 찬성 토론에 나서, 소수 야당의 반대 토론을 희석시킨 것도 2016년과 달라진 모습이다. 이미 민주당은 지난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필리버스터 때부터 맞불 전략으로 야당에 대응하고 있다. 토론 참여 자체를 문제 삼을순 없지만, 도입 취지를 거스르는 일이라는 비판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실제 지난 14일 남북관계발전법 개정안 필리버스터 막바지 때 이런 분위기가 감지됐다. 국민의힘이 마지막 토론 주자로 주호영 원내대표를 예고했지만, 직전 토론자인 이재정 민주당 의원이 종결 투표 가능 시간까지 발언을 이어가면서 '소수야당' 발언권이 제약된 것이다. 3시간 분량의 발언을 준비했던 주 원내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6분이었다. 이에 대해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5일 "소수 야당이 거대 여당에 대항하기 위한 합법적 수단인 필리버스터를 여당이 정략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③여야 불문한 실언논란도 필리버스터 의미 퇴색


여야를 불문하고 잇따른 실언 논란이 이어진 것도 필리버스터 의미를 퇴색시킨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 10일 공수처법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선 이철규 국민의힘 의원은 '아녀자'라는 표현을 써 '여성비하' 논란에 휩싸였다. 이튿날인 11일에는 홍익표 민주당 의원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법조기자단을 해체했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이후에도 여야 의원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제성 발언으로 도마에 올랐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다수가 뭐든 할 수 있으면 의회 없이 행정부만으로 나라를 운영하면 된다는 얘기와 같다"며 "다수의 뜻과 맞지 않다고 해도, 소수의 말할 기회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필리버스터가 법의 테두리에 안에서 소수당이 가진 '최후의 보루'라면 '취지' 자체는 일관되게 존중돼야 한다는 얘기다.

박진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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