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료 멈춤? 세금부터 탕감하라

입력
2020.12.18 18:00
22면
영업금지한 건 정부인데 임대인 책임?  
공정으로 도덕영역까지 강제할 순 없어 
현 정부 공정이 지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에 전 국민의 가슴은 뭉클했다. 없는 이들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는 기울어진 운동장, 온갖 반칙이 난무해 정직한 이들만 바보가 되는 일상, 빈익빈 부익부와 계층 고착화에 따른 병폐로 희망이 안 보이는 사회에 분노가 컸던 때라 공감을 불렀다. “공정은 촛불혁명의 정신”이란 대통령의 말엔 역사적인 소명 의식마저 느껴졌다. 공정은 핵심 국정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이 정부의 공정도 결국 내로남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니냔 지적을 낳았다. 추미애-윤석열 갈등 속에서도 문 대통령은 절차적 공정성과 정당성을 주문했지만 그 울림은 공허했다. 법을 공부하신 분들의 추잡한 정치에 국민의 피로도는 임계치에 다다랐고, 그만큼 공정과 개혁의 의미는 퇴색됐다.

문 대통령에게 공정은 여전히 시대적 요구이자 전가의 보도다. 코로나19란 위기 상황에서 재계의 우려와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정 경제'라는 이름으로 상법 개정안 등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젠 공정이란 잣대를 상가 임대료 등 사적 계약에도 들이댈 참이다. 문 대통령은 14일 "코로나19로 영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는 경우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이) 매출 급감에 임대료 부담까지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게 과연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했다. 이어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여당에선 집합금지 업종에 대해 임대인이 임대료를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임대료 멈춤법’을 발의했다.

마음씨 착한 대통령의 말은 도덕적으로는 틀린 데가 없다. 그러나 시장은 선악의 영역이 아니다. 착한 임대인 운동을 통해 임대료 인하를 권장할 순 있어도 법으로 강제하는 건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선을 넘는 것이다. 세입자를 보호하겠다는 선의를 내세웠지만 결국 세입자를 최대 피해자로 만든 임대차법의 과오를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더구나 방역을 위해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게 영업을 하지 말라고 한 건 다름 아닌 정부다. 책임을 따진다면 장사를 못하게 한 정부가 더 큰데 임대인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건 이치에 안 맞는다. “임대인에게 임대료를 받지 말라고 하기 전에 정부부터 세금을 받지 않는 게 순서다” “국회의원과 공무원도 세비와 봉급을 받지 말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무엇보다 임대인도 코로나19로 피해를 보고 있는 국민이다. 모든 이를 보듬고 통합해야 할 대통령이 편가르기를 하면 세상은 험악해지고 민생은 팍팍해진다.


사실 현 정부의 ‘공정’은 중국의 ‘공정’과 너무 닮아 있다. 시진핑 주석은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으로 ‘부강 민주 문명 조화 자유 평등 공정 법치 애국 경업(직업정신) 성신 우선(우호)' 등 12개 문구를 선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2015년 4월 이 가운데 공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공정은 권리를 지키는 저울이다...우리가 주창하는 공정은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강조할 뿐 아니라 '결과의 정의'까지 고려하고, 이를 사회 각계각층에서 실현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 취임사와 판박이다.

공정의 가치를 부인할 사람은 없다. 인류 보편적 가치를 한 나라가 독점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공정이 사회주의 국가가 추구하는 공정과 같을 순 없다. 기회가 평등하고 과정도 공정하면 결과는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게 정의에 더 가깝다. 이마저 강제로 똑같이 나누겠다면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누가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려 하겠는가. 자꾸 걱정만 느는 연말이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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