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도 차별도 없는 세상이 올 때까지...쇼는 계속된다

입력
2020.12.12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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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넷플릭스 '더 프롬'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12월은 나에게 뮤지컬의 달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벤트로 나에게 뮤지컬 티켓을 선물하는 것만큼 멋진 일도 없었다. 12월이면 일주일에 한 두 번은 대학로를 찾곤 했다. 극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렜다. 해가 일찍 저무는 대신 어둠을 밝히는 작은 조명들이 도시 곳곳에 반짝이고, 그 반짝임을 따라 걷다 보면 마음도 일렁였다. 그렇게 연말과 크리스마스의 무드가 뒤섞여 더욱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으면 언제나 무대가 있었다. 무대와 그 안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관객이 되는 일을 정말로 사랑했다.

나는 앞선 모든 문장을 과거형으로 썼다.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모든 일이 1년 전까지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지난 일년간 무대를 올리고 무대 아래 관객이 되는 일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무대를 향해 환호의 함성을 보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12월, 극장이 가장 북적이는 시기에 또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격상되며 거의 모든 극장이 문을 닫고 대부분의 연극과 뮤지컬이 중단되거나 개막을 미뤘다. 여전히 믿기지 않지만, 2020년 12월에는 뮤지컬이 없다.

‘더 프롬’이 11일 넷플릭스에 공개되기 전, 영화관에 걸려있을 때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12월이 찾아왔으므로 뮤지컬을 보고 싶었다. 평범한 대사를 하다가도 머리 위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면 아무렇지 않게 춤추고 노래하고, 그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세계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만 같았다. 모두 함께 울고 웃다가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를 듣고 또 보는 경험이 너무 그리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더 프롬’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만큼은 충분히 제 몫을 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신나는 뮤지컬이 막을 내리고 극장의 불이 꺼지고 난 뒤, 그 바깥에서 몇 가지 질문을 던져준다.

‘더 프롬’은 2018년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올렸던 동명의 뮤지컬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브로드웨이의 빛나는 스타 디디 앨런(메릴 스트립)과 베리 글릭맨(제임스 코든)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전 대통령의 영부인이었던 엘리너 루스벨트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무대 위에 올린다. 하지만 개막일에 비평가들에게서 혹평을 받아 무대가 사라지게 되면서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한다. 그때 코러스 아니면 대타로만 커리어를 이어온 뮤지컬 배우 앤지 디킨슨(니콜 키드먼)이 SNS에서 화제가 되는 사건을 하나 알려준다. 인디애나의 작은 마을에서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여자 고등학생 엠마(조 엘런 팰먼)의 졸업 무도회 참석 여부를 두고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 이들은 엠마를 지지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만들면 자신들의 이미지가 회복될 수 있음을 직감하고, 인디애나로 향하는 버스에 오른다.

도입 줄거리만 봐도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뉴욕에서 인디애나 시골 마을로 우르르 떠나는 화려한 뮤지컬 배우들의 모습과 이들의 시끌벅적함에 압도되는 마을 사람들이 대조되는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성 소수자 자녀와 부모와의 갈등이 눈물을 자아내고, 배우들의 진심을 둘러싼 오해를 해소하는 데에도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그리고 마무리는 ‘더 프롬’ 곧 졸업 무도회라는 제목과 걸맞게 화려하고 신나는 쇼가 될 게 틀림없다.


이와 비슷한 예측을 했다면 어떤 부분은 맞고 어떤 부분은 틀리다. 그러니 이 예측이 감상에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한 가지에 대해서는 미리 생각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곁가지를 떼어낸 후에 남는 이 영화의 중심 소재, 그리고 주제에 대해서 말이다. 평범한 우리들 중 누군가는 같은 성별을 사랑하고 그건 하나도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이 영화는 신나지만 가끔은 지루한 설교 같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영화는 비로소 흥미로워진다.

‘더 프롬’의 영화 밖에서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속된 집단 모두에게서 따돌림당하는 고등학생의 고통을 너무 가볍고 건강하게만 그린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비록 엠마가 “상징도, 교훈도, 희생양도” 되고 싶지 않고 그저 여자친구와 같이 춤추고 싶은 평범한 학생일 뿐이라도, 이 영화는 엠마를 통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최대한 쉽고 친절하고 또 따뜻하게 전달하는 게 이 영화의 방식이다.

그래서 ‘더 프롬’은 차별주의자들을 이해시키고, 이들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감정은 자연스럽고 당연함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꽤 긴 시간을 쏟는다. 특히 일자리가 없는 뮤지컬 배우인 브렌트(앤드류 라넬스)가 신앙을 가진 개인이 종교의 율법에서 입맛에 맞고 원하는 구절만 골라 취할 수 없다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종교를 앞세우는 차별주의자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기초적인 설교에 가까운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여기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를 포함한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지난 여름에야 겨우 발의된, 아직은 차별이 금지되지 않는 나라 한국이라는 걸 생각해보자. 어떤 면에서는 식상하다고 느낄 수도 있을 법한 전개와 메시지는, 지금 여기와 만날 때 의미가 생긴다. 교육에 나쁘다는 이유, 그리고 소수라는 이유를 들어 성 소수자인 엠마가 졸업 무도회에 참여할 수 없다고 결정하는 학부모회의 모습은 악의는 없다고 말하면서도 차별에 대한 논의를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을 닮았다. ‘더 프롬’이 춤추고 노래하는 쇼를 보여주면서 설득하고자 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가치는 아직 한국의 누군가는 얻어내지 못한, 누군가는 얻어내기 위해 싸우고 있는 권리다.

과연 한국의 보통 관객들은 이 이야기를 가족과 사랑, 이해와 연대에 대한 이야기로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궁금하다면 가족 모두가 함께 신나게 웃고 박수치며 볼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로 ‘더 프롬’을 골라본다면 어떨까? 올해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더 프롬’을 함께 보는 일은, 차별에 대한 가족 구성원 개인의 생각을 확인해볼 수 있는 흥미롭고 가치 있는 시도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극장에 갈 필요도 없이 거실에서 함께 TV로 볼 수 있지 않은가.


‘더 프롬’이 영화 밖에서 던져주는 또 다른 질문은 다시 여기서 이어진다. 모든 극장 개봉 영화에는 ‘홀드백’이라는 제도가 적용된다. 개봉 영화가 스크린이 아닌 다른 플랫폼으로 이동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 이 제도는, OTT 제작 작품에는 역으로 적용된다. 플랫폼에 공개되기 전 일정 시간 동안 극장에서 반드시 개봉을 해야 하는 조건을 걸고 극장에서 스크린을 열어주는 것이다. 거의 모든 할리우드 작품들이 개봉을 잠정 포기하거나 연기한 상황에서 ‘더 프롬’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제도 덕분에 영화관에서 OTT 플랫폼에 공개되기에 앞서 ‘더 프롬’을 볼 수 있었다. 더 큰 화면으로 화려하게 변하는 화면을 지켜보고, 더 좋은 음향으로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이런 뮤지컬 장르의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경험과 TV나 그보다 작은 화면을 통해 보는 경험에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일이 어려웠던 것처럼,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 일 또한 어색한 일이 됐다. 이 상황이 앞으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영화의 장르나 규모, 이야기를 어떻게 변화시키게 될지에 대한 질문이 너무 무겁다면, 우리에게 무대나 영화관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한 번씩 생각해보아도 좋겠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최종 목적지인 졸업 무도회에서, 차별도 편견도 없는 세상을 꿈꾸며 모인 사람들이 노래한다. ‘미래에 가능한 세상을 모두에게 보여줘요. 그날이 오기 전에는 무대로 모여요.’ 편견이 없는 세상은 아주 먼 미래에 찾아올 것 같은 반면, 무대로 모여든 사람들의 일부가 되는 경험은 먼 과거의 일인 것만 같다. 모여서 춤을 추고 노래하는 것이 불가능한 세계를 살다보니, 모든 일이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영화 속 뮤지컬 배우들은 차별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다며 “사람들은 쇼를 좋아한다”고 외친다. 이 뻔한 대사에도 나 역시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가 노래 몇 곡으로 해결되고, 모두가 춤을 춰도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가짜 세계에 매혹되는 동시에 이야기에서 진실을 발견할 수도 있는 장르가 바로 뮤지컬이다. 나도 이런 쇼를, 뮤지컬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니 편견도 차별도 없는 세상도,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무대도, 하루라도 빨리 찾아오기를. 내년 12월에는 이 모든 걱정과 질문이 과거의 것이 되어버리기를 정말 간절히 바란다.

윤이나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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