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길 수 없는 건 '가난 혐오'

입력
2020.12.18 04:30
26면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가난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이 말은 다시 쓰여야 한다. 정작 숨길 수 없는 건 '가난 혐오'다. 적어도 2020년 한국에선 그렇다. 모두가 부지불식간에 들키고 마는 건 가난이 아니라 가난에 대한 무지, 혐오, 공포다.

비슷한 유년을 보낸 지인들과 종종 나누는 대화가 있다. "사람들은, 좀 멀쩡하다 싶은 애는 당연히 중산층 화이트칼라 자식일 거라 생각해" "정말 그래" 우연히 가정사 일부를 알게 되면, 여지없이 상대가 동그란 눈으로 반문했기 때문이다. "정말? 강남 딸내미인 줄 알았는데?" "어렵게 자란 티가 안 나는데" "아버지가 엄하시다며?"

선량한 선생님, 정의로운 선배, 친절한 동료 등. 모두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듯했다. 비좁은 빌라, 블루칼라 노동자의 집, 혹은 공공임대주택에서도 아기 살냄새가 나고, 문학책이나 연애편지가 굴러다니고, 자식에게 지극한 엄부자모가 산다는 것을.

최근 '공공임대주택 논쟁'은 그런 가난 혐오를 다시금 수면 위로 들어내는 일이었다. 발단은 문재인 대통령의 공공임대아파트 방문이었다. 문 대통령은 44㎡(13평형) 복층 아파트를 보며 "4인 가족도 살 수 있겠다"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게 실은 '우리가 아는 21평형'이었다거나 '말한 게 아니라 질문'이었다는 반박과 해명도 나왔다.

제일 논란이 된 건 정치권과 언론에 도배된 '임대 비하'였다. "니가 가라 임대주택" "대통령 자식이라면 살라고 권할 수 있겠냐" "아니, 그러니까 누가 평생 살랬냐"는 말들이 오갔다. 대통령을 비난하는 쪽도 옹호하는 쪽도 인식은 사실 비슷했다. 왜 하필 이 세계의 발언 권력은 온통 저들의 것인가.

성난 말들은 계속 번졌다. “저런 데서 애를 낳는 건 아동학대야” 혹자는 급소라도 찔린 듯 화를 냈다. "어디서 감히 임대주택에 살라고?" 하는 표정이었다. 평소 스스로 해왔거나 절감한 가난 혐오, 그리로 밀려선 안 된다는 공포, 그래서 기본 중 기본 욕망으로 삼은 ‘내 집 마련’이 어려워진 상실감이 흘렀다.

물론, 어느 모로 보나 정부가 섣불리, 마음껏 ‘임대여도 괜찮아’를 외쳐도 좋은 계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 정작 절실한 이들에게 임대주택은 아직도 높은 경쟁률의 로또다. 누수와 하자에 답이 느린 기다림의 공간이다. 편견을 감내해야 할 심적 전쟁터다. 계약 만기 후엔 치솟은 분양가 요구가 두려운 불안의 거처다. 정부가 무턱대고 '살기 좋다'고 말하기 전에 정면 돌파했어야 할 개선점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부지불식간에 세상에 쏟아진 계급차별과 혐오에 다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다. 뭐가 문제였는지, 당사자들이 진심으로 돌아봤으면 좋겠다. 경제적 양극화와 불평등 속에서도 분투하며, 보람과 행복을 꾸리는 이들의 삶을 납작하고 건조하게 실패작으로 비하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애당초 예쁜 이벤트를 하려다 온 국민의 질색 팔색만 유발한 청와대도 '보여주기 행사'는 그만 뒀으면 좋겠다. 청와대는 뭇매만 맞았다. 한국토지주택관리공사(LH)는 행사 예산만 4억 5,000만원을 썼다. 방문 주택 4,290만원어치 밤샘 공사에 이웃 주민은 밤잠을 설쳤다. 가만히 있던 전국의 신혼부부, 다자녀, 고령자, 국가유공자 등 다양한 얼굴의 임대주택 주민들은 별안간 정치권과 온 국민의 ‘임대 기피’만 재확인했다. 곳곳이 상처다. 사람들이 '살고 싶은 집'을 환한 사진 몇 장으로 정할 리는 없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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