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시대,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입력
2020.12.08 18:00
26면
코로나 끝나도 더 큰 환경위기 남아 있어
재앙은 세계적인데 대응은 개별국가 차원
'공존'을 위한 국가능력과 국제질서 시급



코로나 대유행의 위험 속에서 해외 백신 개발 소식이 들려와 기대를 모으고 있다. 1년 정도만 잘 버티면 두려움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다. 코로나 이후 세계는 새로운 예방접종의 절차만 남긴 채 코로나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다. 과연 그럴까.

코로나 사태는 여러 면에서 감추어져 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한 계시와 같은 사건이었다. 이미 시작되어 서서히 그러나, 엄청난 규모로 세계를 위협하고 있는 환경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코로나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끼리의 비대면과 IT 소통 기술로 버텨 냈지만 파괴된 자연이 안겨주는 재난들과 비대면할 수 있는가. 태풍과 가뭄, 해수면 상승과 산불을 막을 기술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가. 많은 국가가 2050년경을 목표로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중립화되어야 할 대상이 탄소 뿐일까. 탄소 배출의 영향만 막으면 인류의 생존을 지구가 허락할 것인가.

코로나 사태는 지구적 문제였지만 대응은 지극히 국가적이었다. 기술의 발전 수준, 위험의 확산 속도를 볼 때 세계는 하나다. 세계인의 마음이 수백 갈래로 갈라져 있을 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계화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했다. 인구의 이동이 바이러스의 창궐을 가져왔고 세계화는 지구인의 효용과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코로나 사태에 대한 대응은 안팎으로 국가의 권능 강화였다. 국경을 높이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조치를 강화하는 일이었다. 바이러스의 유입을 막고 방역의 필요에 따라 인구 이동을 제한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문제는 국경봉쇄가 국가들 간의 협의와 협력 없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들은 자국 이익의 관점에서 사고하고 대응했다. 이미 자리 잡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세계주의, 국경을 넘은 거버넌스를 만들어 내지 못했던 모두의 책임이다. 세계화의 역풍은 국가들 간 빈부격차, 보호무역주의, 이민반대, 정치양극화 등으로 경험하던 터였고 코로나 사태는 관리되지 않은 세계화의 실상을 보여 주었다.

환경이 '문제'가 된 것은 온전히 인간의 탓이다. 그리고 우리 세대의 탓이다. 대기 중에 배출된 탄소의 절반 이상은 지난 30년간 배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세대의 발전 여유분을 우리 세대가 모두 당겨 쓴 것이다. 지속불가능한 발전을 해놓고 오염된 지구를 물려주는 세대가 된 것이다.

다음 세대에 대한 오명뿐 아니다. 인류가 지구를 지배했던 소위 인류세(人類世, Anthropocene)는 다른 생물종과 무생물들의 질서에 엄청난 파괴를 자행한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간 중심주의와 자본주의하에서 자연은 착취와 이용의 대상이지 보호와 동화의 대상이 아니었다. 인간이라는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이지만, 사실 인간은 '사람과 다른 생물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을 자연과 격리된 주체로 상정하는 생각이 보편화된 순간, 철학적 의미의 환경 파괴가 시작된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자국 우선주의를 외치고 있는 국가지도자들은 위기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바이든 미대통령 당선인은 파리기후협약 복귀를 약속하였고, 환경문제 해결을 최우선 국가과제로 꼽았다. 최대 온실가스 배출국인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2060년을 탄소중립 목표해로 설정했다. 한국도 2050년 탄소중립과 그린 뉴딜로 동참하고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환경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현실화시켜야 하는 주체는 여전히 국가이다. 전쟁과 무역갈등, 핵무기와 관세가 우리의 에너지를 소진하기 전에 지속가능한 발전과 환경보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외교정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때이다. 자연 속의 인간, 인간 속의 자연에 주목하고, 새로운 인간의 개념을 “발명”하여 미래 세계질서를 건설할 때이다.



전재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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