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는 '봉사자'가 아닌 '전문가'입니다"

입력
2020.12.07 23:30
여승훈 상록수기억학교 소장



“오래도록 현장에서 뛰고 싶어요.”

여승훈(38)상록수기억학교 소장은 사회복지사로부터 도움을 받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새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 여 소장은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복지가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절절하게 체험한 만큼 복지대상자들을 뵐 때마다 내 일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게 된다.”면서 “사회복지사로서의 이력이 끝날 때까지 한분이라도 더 돕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한복을 입고 화장을 한 사연

“할머니는 왜 그렇게 입고 와? 내가 친구들 앞에서 너무 창피해!”

여 소장은 조손가정에서 자랐다. 증조할머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여동생까지 다섯 식구가 200년이 넘은 한옥에서 살았다. 어릴 땐 원망도 많이 했다. 특히 친구 집에 다녀오기라도 하면 며칠 동안 울적한 기분으로 지냈다. 한번은 할머니가 학교에 찾아왔다. 그의 눈에 할머니는 밭에서 일하다 온 것 같은 옷차림이었다. 학교에 올 때 예쁘게 꾸미고 오는 친구들의 엄마와 비교됐다. 집으로 돌아와 할머니에게 화를 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학교에 올 때 한복을 차려입고, 진하게 화장을 했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열등감이 깊어졌다.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혼자 있는 시간이 편했다. 혼자 있을 땐 늘 그림을 그렸다. 자연스럽게 미대 진학을 꿈꾸게 됐다. 그러나 가난한 가정환경에 미대 입시학원에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미술학원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해 이용자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간 늦은 밤에 학원에 들어가 그림 연습을 했다. 꿈을 위해 아등바등 노력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독학만으로 미대에 진학할 만한 실력을 쌓기는 어려웠다. 결국 미대 진학을 포기했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출발점에 서서 진로를 고민했다.

“나와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해보자!”

결론은 사회복지사였다. 사회복지사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가장 익숙한 직업이기도 했다. 진로에 대한 확신이 신념으로 바뀐 건 10여년이 흘러 상록수재단에 입사한 뒤였다. 그때 일을 처음 가르쳐준 선배가 여 소장의 집에 도움을 준 적이 있는 사회복지사였다. ‘사회복지사가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락 배달하다 할머니를 구출하다

그는 대구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사회복지사로서의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회복지사가 되고 2년간은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아침부터 오후 2시까지 매일 어르신들 집 앞으로 도시락을 배달을 했어요. 내가 사회복지사인지 도시락 배달원인지 헷갈렸어요. 회의감이 들더군요.”

그러다 사회복지사로서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여느 날과 같이 도시락 배달을 갔는데 문 앞에 전날 드린 도시락이 그대로 놓여있었다. 보통 도시락이 그대로 있으면 돌아가셨을 가능성이 높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할머니는 물론이고, 집안의 물건들도 몽땅 사라지고 없었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할머니를 찾아다녔다.

마을의 어느 집 앞을 지나다 장기요양시설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혹시나 싶어 문틈으로 집안을 들여다봤다. 그렇게 찾아 헤맸던 할머니가 거기에 있었다. 할머니는 울고 있었다. 그곳은 치매 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당시 장기요양보험법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도적 허점이 많았다. 시설 운영자인 부부가 제도적 허점을 이용해 할머니를 가두고, 이용자 수를 허위로 늘린 것이다. 치매 환자도 아닌 할머니가 그곳에 계속 있으면 환자들의 영향을 받아 치매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구출이 시급했다.

할머니께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할머니가 원래 살고 있던 집의 주인이 집을 처분한다고 해 당장 갈 곳을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사실을 안 시설 운영자 부부가 할머니에게 접근해 좋은 말로 유혹했다. “할머니 앞으로 나오는 수급비를 자신들에게 주면 평생 보살펴주겠다”고 했다. 부부는 하루 사이에 할머니의 살림살이를 몽땅 팔아버리고 할머니를 데려간 것이다.

여 소장은 부부를 신고하고 할머니를 무사히 구출해냈다. 할머니가 고민하고 있던 거주 문제 해결에도 도움을 주었다. 여 소장은 “사회복자사였기에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사회복지사의 역할이 무엇인지 여실하게 체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50년 평생 영화를 처음 봤어!”

여 소장은 현재 상록수재단 소속으로 상록수기억학교에서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치매노인종합지원시설인 기억학교는 대구에만 있다. 치매와 같은 노인성 질환을 가진 노인들을 요양하는 시설은 몇 곳 있지만 치매의 경계선에 해당하는 분들을 돌보는 곳은 부족하다.

상록수 기억학교는 노인들이 중증 치매로 가지 않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사문진 나루터에 배를 타러도 가고,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50년 평생 영화를 처음 봤다”고 말했다.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여 소장이 있는 곳은 대기 인원이 평균 5명 정도 된다. 여 소장은 “대기 인원이 많은 편”이라고 밝혔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6개월간 휴원을 해야 했다. 휴원 기간에 기억학교 이용자들을 대상으로 인지지능 검사와 우울증 검사를 진행한 결과 이용자 중 10%가 치매가 심해졌다. 휴원으로 집에만 있다 보니 우울증과 치매 증세가 깊어진 것이다.

여 소장은 휴원이나 쉬는 날에도 이용자들이 집에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도록 칠교놀이, 영어교실, 체조 등 콘텐츠 방송을 제작했다. 대학생들과 협업해 이용자들에게 태블릿pc 사용법을 가르쳐 드리고 제작된 콘텐츠를 유용하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다음 목표다. 여 소장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치매 어르신들이 집에서도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회복지사는 ‘봉사자’가 아닌 ‘전문가’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복지사가 타인을 변화시키고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 폭과 넓이를 소화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누구나 인정하는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매일매일 노력하겠습니다!”

김채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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