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2월24일 저녁, 텅 빈 도로에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성구(65) 대구광역시의사회 회장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별진료소마다 코로나19 의심환자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인력이 너무 부족했다. 가까운 이들에게 자원봉사 의향을 타진했지만 선뜻 나서겠다는 의사가 별로 없었다. 당시 군의관과 공중보건의까지 대구로 달려오고 있었으나 그들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문득, 도산 안창호 선생이 남긴 격언이 뇌리를 스쳤다. 옛 선구자처럼 다수에게 호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잠옷을 입은 채 펜을 들었다.
‘우리의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들은 공포에 휩싸였고 경제는 마비되고 도심은 점점 텅 빈 유령도시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 위기에 단 한 푼의 댓가, 한마디의 칭찬도 바라지 말고 피와 땀과 눈물로 시민들을 구합시다. 우리 대구를 구합시다!’
다음 날 새벽 5시에 대구시의사회 임원들이 모인 단톡방에 편지를 올렸다. 이후 메시지는 대구의사회에 소속된 5700여명의 회원들에게 전달됐다. 이 회장은 아침을 먹고 9시에 동산병원 선별진료소로 들어갔다. 감염을 각오한 봉사활동이었다. 그는 내심 진료소 활동을 하면 100% 코로나에 감염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장이 진료소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을 때 주변에서 “적잖은 나이에 위험하다”며 말린 것도 감염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의 호소문에 담긴 ‘피와 땀, 눈물’은 선별진료소 근무자와 자원봉사자들에게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봉사 시간 3시간을 모두 채우고 나와보니 말 그대로 난리가 나 있었다. 대구시의사회 회원은 물론, 회원들이 자신과 교류가 있는 타 지역 의사나 같은 학회에서 활동하는 회원들에게 호소문을 전파하면서 전국 의료인들 사이에 이슈가 된 것이었다.
“전국에서 동료들이 몰려오는 모습을 보면서 임진왜란 때 관군이 무너진 후 의병들이 모여 전장으로 떠나는 모습이 연상했습니다. 뭉클했죠.”
‘100명만 와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편지를 띄웠으나 320명이나 자원봉사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나중에는 나름의 커트라인도 정했다. 열흘에서 보름 정도 문을 닫고 올 수 있는 의사들만 자봉 신청을 받았다. 커트라인에서 ‘탈락’한 의사들은 모두 전화상담에 투입됐다. 이들은 각자 자리에서 근무하면서 전화로 코로나19 상담을 비롯해 병원에 오기 힘든 환자들의 상담을 맡았다.
“의사도 사람인지라 새로운 질병이 퍼지면 두려움이 있습니다. 코로나 같은 경우도 홍콩 의사들은 방역 장비를 지원해주지 않는다고 진료를 거부했고, 일본에서는 검체 채취가 위험하다는 이유로 의사들이 자신이 직접 체취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탈리아 의사들은 고령의 환자를 내치고 젊은 환자들만 돌봤고, 스페인에서는 요양병원 환자들을 방치한 채 도망쳐버린 의사들도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예가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의사들이 만든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대한의사협회중앙회를 비롯해 전국에서 성금과 물품이 쏟아졌다. 이 회장은 “대구시의사회 70년 역사에서 그만큼 성금과 물품이 쏟아진 적이 없었다”면서 “의사회 사무실 앞마당에 가득 쌓인 물품을 보면서 기분이 좋다기보다 깜짝 놀라서 어안이 벙벙했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염원과 헌신은 기적을 만들었다. 하루 최대 741명까지 쏟아졌던 확진자를 53일만에 ‘0’으로 끌어내렸다. 전국에서 달려온 의사들의 자발적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이 회장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영국의 사회사상가 존 러스킨은 ‘군인은 전장에서 자기가 맡은 자리를 떠나기보다 차라리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며, 의사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자신의 임무를 버리기보다 차라리 목숨을 버려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사회가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할 때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이 회장은 “많은 분들이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지만, 저는 그저 제 자리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면서 “국민들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역사를 만들어준 동료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