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사협회는 몇 달 전 국민에게 물었다. ‘전교 1등’ 의사를 택할지, ‘성적은 모자라지만 추천제로 입학한 공공의대 출신’ 의사를 고를 것인지. 학력 제일주의에 물든 이들의 낯뜨거운 호소가 불러 일으키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은 누구의 것이어야 할까. 의협의 ‘1등 의사’들이 창피함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능력이 부족하고 성적이 떨어지는 사람은 괄시해도 좋다는 사고가 만연한 사회 풍조 탓일 것이다.
능력주의는 현대사회의 주요 화두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분배하는 보상과 인정 시스템을 말한다. 제한된 사회적 지위를 놓고 경쟁할 때 신분이나 재산, 운이 아닌 노력과 재능에 우선권을 준다는 생각은 일견 정의로워 보인다. 효율성과 공정성에서 능력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실력이 뛰어난 의사가 치료도 잘할 것이고, 신분이나 인종이 아닌 실력에 따라 대우를 해주는 것이 어떻게 봐도 공정하다.
문제는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이 정교하지도 않을뿐더러 능력을 펼칠 기회도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성공을 쟁취한 이들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으로 승리했다고 여기면서 보상을 독차지하는 걸 정당화하는 것도 능력주의의 부작용이다. 일의 존엄성까지 깎아내리는 악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세계를 작동하는 원리였던 능력주의는 이미 뚜렷한 균열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선 뇌물과 답안지 조작을 통한 부유층의 입시 부정이 드러났고, 국내에선 ‘부모 찬스’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사회 지배층의 사례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공분을 사고 있다.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은 올해 서울대ㆍ고려대ㆍ연세대 전체 신입생 중 55.1%, 의대 신입생 74.1%가 월소득 상위 20%인 949만원 이상의 부유층 출신이라는 최근 통계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능력주의의 허상을 깨는 책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최근 국내 출간된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능력주의가 공평하고 공정한지 또 윤리적인지 묻는다. ‘능력의 폭정: 공동선은 어떻게 됐나’라는 원제가 말해주듯 능력주의가 사람을 억압하고 폭정을 저지르며 공동선을 훼손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센델이 인용한 것처럼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은 근래에 시작한 게 아니다.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은 1958년 ‘능력주의의 등장’에서 능력주의가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퍼트리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승리를 자신의 능력으로 얻은 당연한 보상이라 여기며 자신보다 덜 성공적인 사람을 업신여기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덧붙였다. 실제로 능력주의를 통해 쌓은 부와 지위는 세습되면서 새로운 특권층을 형성했고, 이렇게 쌓인 능력은 다시 부와 지위를 독점하고 있다.
센델은 능력에 비례하는 보상이 완벽히 평등하고 공정하게 이뤄진다 해도 정의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능력주의의 이상이 이동성에 있지 평등에 있지 않고 결과적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능력주의를 완전히 배격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성공한 사람과 덜 성공한 사람이 공동선을 이루며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그는 “사회가 우리 재능에 준 보상은 우리의 행운 덕이지 우리 업적 덕이 아님을 찾아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며 명문대 입시를 일정 수준 이상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 하자고 제안한다. 행운이 보상의 근거라면 자신의 능력을 뻐기지도, 자책하지도 않을 거란 생각에서다. 직업 훈련에 공공자원과 예산을 더 많이 투입해야 한다는 제안도 참고할 만하다.
사회비평가 박권일과 사회운동가 홍세화 등 10인의 필진이 쓴 ‘능력주의와 불평등’은 한국의 교육과 사회를 지배하는 능력주의의 해악을 비판한다. 센델이 미국의 입시 제도를 능력주의 문제의 근원으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청소년운동활동가인 공현은 평가와 입시 방식을 바꾸는 것만으론 능력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한다. 능력에 따른 차별이 아닌 평등한 존중과 환대의 경험을 만들어내는 학교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교사 정용주는 빈곤 가정 학생을 예로 들며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능력을 가질 기회마저 차단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능력주의 신화는 헌법에서 시작한다. 교육학자 이경숙의 지적처럼 헌법에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라는 문구가 있다. 능력에 따라 권리를 제약할 수 있다는 논리는 사회 전반으로 확산했다. 노동 현장에서도 능력과 성과는 흔히 차별의 근거가 된다.
박권일은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화에 대한 반발을 ‘공정성 내전’이라 부르며 학력 중심 능력주의가 공정의 탈을 쓰고 혐오와 차별을 유발한다고 말한다. 능력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건 옳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면서, ‘개천용’이 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마이클 센델이든 '능력주의와 불평등'의 저자들이든 뾰족한 해법을 내놓진 않는다. 결국 해법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몫이다. 능력주의에 관한 공적 토론이 보다 활발히 벌어져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