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사우나, 수영장...40대의 산속 '플레이 하우스'

입력
2020.12.02 04:30
17면

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건축업을 하는 정병준(44)씨는 10년 전 자녀 교육을 위해 아내와 아들을 제주에 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러다 2년 전 경기 양평군의 산 중턱에 구름처럼 펼쳐진 벽돌집(양평구름벽돌집, 연면적 314㎡)을 지었다. 해발 400m의 땅(대지면적 1,256㎡)에 지은 집은 가족과 떨어져 10년간 열심히 가족을 뒷바라지한 그가 스스로에게 주는 일생일대의 선물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집에 왔을 땐 다 내려놓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 제약을 받지 않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도심의 비싸고 좁은 집보다는 전원의 넓은 집이 적합했다”고 말했다.



2층집 세 개가 차례로…활처럼 둥근 집


그가 원했던 집은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집’이었다. “퇴근 후에 멍하게 앉아 있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해요. 제가 여기서 뭐든지 다 하고 놀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어요. 저만의 ‘플레이 하우스’ 같은 거죠.”

출렁이는 산자락 한복판에 들어선 집은 활처럼 휘어지며 남쪽 마당을 감싼다. 둥그스름한 선을 따라 2층집 세 채가 나란히 이어진 모양새다. 중앙에는 전망대처럼 유리로 된 모서리 창이 둥그스름한 선 사이로 뾰족하게 튀어나와있다. 설계를 맡은 이병엽 건축가(바이아키 건축사사무소)는 “아름다운 풍경을 담을 수 있게 집을 배치했고, 원래 있던 커다란 바위를 살리고, 그 위에 인공의 바위(집)를 올리기 위해 공중에 붕 뜬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집은 다른 가족들이 올 때를 대비한 손님 공간과 거실과 주방이 있는 공용 공간, 그리고 가족들 방과 영화관이 있는 사적 공간으로 구성됐다. 세 개의 공간은 서로 연결돼 있지만 미세하게 비틀린 각도와 영리하게 낸 창과 동선으로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평소엔 정씨 혼자 지내지만 방학 때나 주말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지낸다. 다른 가족들도 종종 와서 가족모임을 하기도 한다.

세 공간은 10인용 긴 테이블이 있는 식당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식당의 양측에는 창을 통해 앞마당과 뒷마당이 활짝 열린다. 뒷마당에는 농구장이, 앞마당에는 집의 둥근 선에 맞춰 야외 수영장과 노천탕이 있다. 수영장 너머에는 사계절 푸른 이끼가 깔려 있다. 관리 편리성 때문에 이끼를 선택했는데 이국적인 풍경을 덤으로 얻었다. 분홍빛 핑크뮬리와 은빛의 억새가 어우러져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씨는 “겨울이면 아무래도 풍경이 삭막해지는데 이끼는 물만 뿌리면 사시사철 푸르게 유지된다”며 “겨울에 노천탕을 하면서 마당을 바라보면 외국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반전매력 선사하는 내부

바깥이 전원주택이라면 내부는 도심의 복합문화공간이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다양한 활동을 품어줄 수 있게 공간을 잘게 나누면서도 집에 특별한 요소들이 곳곳에 녹아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사적 공간 1층에는 실제 대형 영화관의 축소판 같은 계단식 의자와 통로가 있는 전용 영화관이 있다. 영화를 즐겨 보는 정씨는 “코로나는 생각지도 못하고 지었지만 요즘 같은 때에 매우 유용한 공간"이라고 만족해했다.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2층에 배치한 거실은 전망 좋은 카페 같다. 집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방향으로 두 개의 면을 유리창으로 이어 압축적으로 풍경을 담아냈다. 눈 앞의 능선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창 앞에는 대청마루처럼 단을 높였다. 누워서 볕을 쬐고, 앉아서 명상도 하고, 간단한 운동도 할 수 있는 공간이다. 뒤를 돌면 천장이 서서히 높아져 6m까지 이어진다. 길고 얇은 천창을 내어 빛과 그림자가 춤을 춘다. 건축가는 “처음 이 땅에 왔을 때 땅의 중앙에 커다란 바위가 있었고, 2층 높이에서 봤을 때 전망이 좋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라며 “바위를 살려 그 위에 인공의 바위(건축물)를 올려보자는 생각으로 공중으로 띄웠고, 그 공간에 거실을 배치했다”고 설명했다.




집에서 방을 찾는 것은 보물찾기에 가깝다. 문고리도 안 보인다. 건축가는 “A공간에서 B공간으로 가는 찰나에도 특별한 경험을 주고 싶었다”라며 “문을 닫아놓으면 그곳에 방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감춰져 있다”고 힌트를 줬다. 부부의 방은 2층 거실의 책꽂이를 밀면 스르르 열린다. 짧은 통로가 꺾여 한번에 침실이 보이지 않게 배려했다. 아들의 방은 1층 영화관 안에 숨겨져 있다. 길게 이어진 영화관의 벽면 한쪽을 슬며시 밀면 방이 나타난다. 정씨는 “‘여기는 방이다, 그러니깐 문이 여기 달렸다’는 식상한 구조에서 탈피하고 싶었다”라며 “이 공간에서 이 공간을 느끼고 다른 공간으로 넘어가면 다른 공간을 느낄 수 있길 바랐다”고 했다. 1층 화장실의 모서리 문은 선물상자가 열리듯 펼쳐진다.



공간이 바뀌자 삶도 달라졌다. 정씨는 “전원주택도 살아보고 아파트에도 살아봤지만 집에 들어가면 즐길 공간이 마땅히 없어서 거실에 앉아 TV보면서 시간을 때우는 게 전부였다”라며 "그런 의미에서 이 집은 퇴근하고 들어가는 집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집"이라고 말했다.

출퇴근만 1시간이 걸리고, 치킨 하나 배달되지 않는 산속 생활이 불편하진 않을까. 게다가 집도 혼자 관리하기엔 크다는 지적에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운전이나 관리로 힘든 게 30이라면, 집에서 만족을 느끼는 게 70쯤 됩니다. 도심에서는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죠. 여기 있다가 서울가면 냄새부터 달라져요. 집에 오는 길이 여행 오는 것 같아요. 그런데 짐을 안 싸도 되고, 낯선 곳에 간다는 긴장감과 피로감도 전혀 없어요. 여행가듯 집으로 오고, 충전해서 다시 나가죠. 아쉬운 점은 친구에게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거예요. 비밀이 탄로나면 집주인이 아니라 펜션 주인이 되고 말 테니까요. (아뿔싸)”


강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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