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11월 말, 영종도 오성산 중턱 전망대에 오르자 연파랑 하늘과 층층이 떠 있는 솜뭉치 구름 아래 넓은 인천국제공항이 보였다. 길이 70m, 무게 400톤이 훌쩍 넘는 육중한 몸매의 보잉 747이 활주로를 힘껏 달리다 가볍게 하늘로 이륙했다.
항공기가 날기 위해서는 자연의 힘을 극복해야 한다. 유선으로 된 비행기는 공기마찰로 인한 항력으로 전진을 방해받는다. 그러나 엔진에서 발생하는 추력으로 그 항력을 극복한다. 중력은 항공기 자체 무게에 승객, 승무원, 연료, 화물 무게까지 더해 아래로 끌어당긴다. 대신 날개 압력 차로 발생되는 양력이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작용해 항공기를 부양시킨다. 2020년 전 세계 항공사는 코로나19라는 난기류를 만나 추력과 양력을 잃었다.
미국 뉴멕시코주 로즈웰 인근 사막에 수천 대 여객기가 모래 먼지를 뒤집어쓴 채 늘어선 화면이 CNN을 통해 전해졌다. 항공사들은 하늘에 띄울 수 없는 비행기를 공항 대신 건조한 사막 위에 보관했다. 미국 언론은 코로나19의 최전선에서 싸웠지만 직장을 잃고 집세와 의료보험은 물론 아기 분유 값마저 걱정해야 하는 승무원들의 딱한 사정을 집중 조명했다. 세계 최대 항공시장 미국은 바이러스 앞에 힘없이 쓰러졌다. 유나이티드 항공과 아메리칸 항공은 9월 말 각각 직원 1만3,000여명과 1만9,000여명에게 임시해고를 통보했다.
두 회사를 포함한 미국 4대 항공사는 지난 4월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 수십억 달러를 받는 대가로 9월 말까지 직원들을 해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시한이 지나고도 업황이 회복되지 않자 결국 인력 감축을 단행했다. 49년 역사상 한 번도 직원을 해고한 적이 없는 사우스웨스트항공 역시 400여명의 직원에게 해고 가능성을 내비쳤다. 수십여개의 지역 기반 소형항공사들은 이미 줄도산 중이다. 항공사 CEO들은 정부에 2차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 정부는 지금까지 250억 달러를 항공업계에 지원한 상태다.
유럽 항공사들도 필수인력인 조종사 감원에 나섰다. 독일의 루프트한자는 조종사 1,100여명을 감원하기로 했고, 영국 브리티시항공도 전체 조종사의 4분의 1인 1,100여명을 줄일 방침이다.
중동 최대 항공사인 에미레이트항공은 올여름 탑승객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될 경우 의료비와 자가격리 비용을 지원하는 이벤트를 벌였다. 타이항공은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법정관리행을 택했는데, 회사는 돈이 되면 뭐든 다 한다는 전략으로 방콕 본사 2층에 비행기 좌석으로 꾸민 기내식 레스토랑을 운영하는가 하면, 사옥 앞에 튀김기구까지 설치해 도넛 장사에 뛰어들기도 했다.
항공기 제작업체에도 칼바람이 불었다. 세계 최대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연이어 발생한 737 맥스 추락 사고에 코로나19까지 겹치면서, 항공사와 리스업체들이 비행기 구매를 잇따라 취소·연기하자, 지난 5월 직원 7,000명을 해고한 데 이어 앞으로 전체 인력의 10%인 1만6,000명을 추가 감원할 계획이다. 또 세계적으로 화물기 주문이 급감하자 747기 생산을 2022년 중단하기로 했다. 1952년 처음 취항한 이 점보기는 ‘하늘의 여왕’으로 불려 왔으나 항공사들이 연료소모가 적은 작은 기종을 선호하면서 인기가 떨어지고 있다. 747기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영국 브리티시항공은 7월 747기 31대를 모두 퇴역시킨다고 밝혔다. 국제 화물 수요가 늘면서 747 화물기가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국내 상황과 대조적이다. 보잉은 또 777과 787기 생산량도 줄일 계획이다. 올해 예정이었던 신형 기종 777X 출시는 2년 늦추기로 했다. 프랑스 에어버스 역시 전체 임직원(13만4,000명) 가운데 11%에 달하는 1만5,000명을 감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항공업계에서는 최근 '목적지 없는 비행'이 화제다. 이륙해서 하늘을 날다가 착륙하지 않고 되돌아오는 여행이다. 시늉만 내는 여행임에도 아시아나항공의 380상품은 출시 20분 만에 비즈니스 스위트와 비즈니스석이 모두 완판됐다. 에어부산도 저비용 항공사 중 최초로 관련 상품을 출시했는데, 부산을 출발해 강원도-서울-제주 상공을 거쳐 되돌아오는 두 시간 코스다. 에어버스의 최신 항공기로 운항하며 실제 좌석보다 100석이 축소된 120석만 승객을 채운다. 제주항공도 인천공항을 출발해 약 1시간30분 동안 광주와 여수, 부산, 포항, 대구 상공을 선회한 뒤 다시 인천으로 돌아오는 상품을 운영 중이다.
얼핏 보면 코로나로 인한 여행객들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해 보려는 상술같지만, 항공사들이 이 상품을 내놓는 속내는 따로 있다. 유급 및 무급휴직에 들어간 조종사들의 비행자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조종사는 90일 이내 3회는 이착륙을 해야 기종자격을 유지할 수 있는데, 글로벌 노선이 죄다 막히면서 대형기종 조종사들은 자격상실 위기에 놓이게 됐다. 자격유지를 위해선 울며 겨자 먹기로라도 비행기를 띄워야 하는 상황에서, 이왕이면 승객을 태워 조금이라도 수익에 보태 보자는 고육지책이다.
정부는 최근 국제 관광 비행까지 허용했다. 출국 후 다른 나라 영공을 선회비행 한 뒤 인천공항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입국 후 진단검사와 격리조치는 면제되며 승객에게는 면세점 이용혜택도 주어진다. 냉정히 생각하면 이동을 위한 비행이 아닌, 그저 비행을 위한 비행이 이뤄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국내 항공사는 대형 항공사(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와 저비용항공사(진에어, 에어서울, 에어부산, 제주항공, 티웨이, 이스타항공, 플라이강원), 소형항공사(하이에어), 화물항공사(에어인천) 등 모두 11개다. 10년간 폭발적으로 성장해 온 항공업계는 2019년부터 성장 엔진이 꺼진 상태다. 2000년대 초반 저비용항공사 붐으로 영남에어, 중부항공, 코스타항공, 인천타이거항공 등 10여 곳 업체들이 난립했지만 출혈경쟁 끝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
코로나19는 항공업계의 지각변동을 촉진하고 있다. 무엇보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는 우리나라 항공시장에 어마어마한 변화를 몰고 올 전망이다. 두 항공사가 합병하면 매출 규모 20조원에 육박하는 초대형 국적항공사가 탄생한다. 파산 위기에 놓인 저비용항공사들도 자연스럽게 구조조정될 전망이다.
국내 항공시장의 포화상태에 대한 우려와 경고는 늘 있었다. 주5일 근무제 시행과 함께 여행이 활성화하면서 항공사들은 무리한 투자와 채용을 이어 왔다. 그러다 하늘길이 막히자, 수많은 비행기와 인력은 오히려 짐이 돼 재무상태를 잠식하고 있다. 최근 10여년간 무조건 공급확대정책을 펼쳤던 정부, 그저 몸집만 불려 왔던 항공업계는 지금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부산-서울 KTX 가격의 반값에 김해-김포 노선 항공권을 팔 수 밖에 없는 현실은 공급과잉과 출혈경쟁의 결과다. 이런 마당에 국토부가 2년 전 신규 면허를 내준 신생항공사 2곳이 항공운항증명 발급을 앞두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 위기는 지나가고 항공사들은 정상화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피해는 오로지 해고된 항공근로자와 비행을 꿈꿨던 청춘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조종사는 플라이트 플랜(비행계획서)에 맞춰 운항하다가도 예기치 못한 난기류를 만나면 항로를 수정한다. 인간은 모두 자기 삶의 조종사며 인생은 긴 항로를 지나가는 비행이다.
100년 전 하늘을 나는 차를 꿈꿨던 헨리 포드의 말로 글을 마친다.
“만약 모든 일이 너에게 불리하게 되어 가는 것 같을 때면 기억하라. 비행기는 바람을 가르고 이륙하는 것이지, 바람의 힘으로 이륙하는 것이 아니다.”
이준영 전 YTN기자(한·미 조종사 자격증 보유)
◆글싣는 순서
① 고개 숙인 조종사들
② 늦깎이 항공유학생의 애환
③ 우리는 '비행낭인'이 아닙니다
④ 위기의 항공, 그 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