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내고 꺼내도 마르지 않는 얼굴, 배우 김대곤

입력
2020.11.30 04:30
21면

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김대곤 [인명] 배우. 더 많은 대사를 주고 싶은 사람.

연극 ‘보도지침’ 초연에 작가로 참여하면서 배우 김대곤을 처음 만났다. “정말 재미있는 배우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 배우가 김대곤이었다. 연습을 참관하러 갔는데 김대곤은 모든 장면에서 활활 날아다니며 배꼽을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내가 가장 감탄했던 장면은 그가 고문형사 역할로 나올 때였다.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대사만 줄줄 말하는데 그 서늘함에 숨을 쉬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밝은 만큼 그늘도 깊은 배우였다. 그의 얼굴을 더 알고 싶었다.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써 놓은 대사가 짧았다. 밤을 꼬박 새워서 고문형사의 독백을 만들었다. 내 기억에 A4 용지로 3장이 넘었던 것 같다. 다음날 김대곤에게 그 독백을 쥐어 주며 말했다. “당신의 독백을 듣고 싶어서 마구 써온 것이니, 당신이 마음껏 넣고 빼고 고쳐도 좋다. 다만, 당신이 이 장면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 그는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특유의 씨익 웃는 얼굴로 독백을 받아들었다.

며칠 후, 그는 그 독백을 온전히 자신의 말로 만들어 왔다. 심지어 다른 배우들이 그 형사의 독백에 설득이 된다며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나는 김대곤의 밝음과 서늘함 이후를 더 알고 싶었다. 뮤지컬 ‘나무 위의 고래’를 준비하면서 그를 섭외했다. 그는 대본을 넘기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저는 어디서 웃기면 되죠?” 난 “가장 진지한 역할로 당신을 섭외했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또 한 번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역시나 씨익 웃으며 대본을 챙겨 갔다. 역시나 며칠 후, 그는 밝음과 그늘을 한 몸에 담아내는 연기를 펼치며 또 하나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많은 언어와 얼굴을 지닌 배우였지만, 오랫동안 하나의 언어와 얼굴만 꺼내 든 채 살아온 것 같았다. 그가 무대 위에서 더 많은 언어와 얼굴로 활약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우리는 시간이 맞을 때마다 공연을 함께 했다. ‘세상친구’에서는 어리숙한 순사보조원에서 분노에 찬 빨치산토벌대로 변신해가는 역할을, ‘분장실청소’에서는 한류스타 매형의 건물에 빌붙어 살기 위해 똑똑하지만 일부러 무능력한 척하는 처남 역할을, ‘사랑가루’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며 울고 웃는 역할을.

그는 술자리에서 늘 웃음이 많으며, 좌중을 웃긴다. 그 웃음의 대상은 늘 자신이다. 난 그가 타인을 대상으로 웃음거리를 삼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와 해학으로 함께 있는 이에게 편하고 유쾌한 웃음을 준다. 그의 유머는 그릇이 참 크다. 그 큰 그릇에 많은 동료가 모여들고, 많은 속마음을 고백하며, 많은 도모로 이어진다. 그는 참 귀한 광장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와 함께 많은 작업을 하고 싶다. 어쩌면 희망사항에 그칠 수도 있다. 그는 수많은 창작자에게 사랑받는 배우이고, 그의 활동은 무대와 매체를 넘나들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더 많이 사랑받을 것이고, 더 많이 넘나들 것이다. 그의 언어와 얼굴은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많아질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나는 즐거워진다. 어쩌면 나는 김대곤의 ‘최초의 얼굴’을 목격한 사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말을 듣고 싶어 독백을 건넸을 때, 말없이 씨익 웃던 그 자신만만한 얼굴을. 밝으면서 서늘하고, 사랑하며 슬퍼하고, 울면서 웃을 수 있는 김대곤의 말과 얼굴이 오랫동안 사랑받으면 좋겠다.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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