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오리 아저씨 “다문화 아이들은 우리 미래의 힘과 에너지”

입력
2020.12.02 05:00
20면

편집자주

은퇴 이후 하루하루 시간을 그냥 허비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삶에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 분노를 표출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 삶은 어때야 하는 걸까요. <한국일보>는 우아하고 품격 있게 인생 2막을 살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수요일 연재합니다.

“딱 마흔 살에 사업 실패와 사기를 당하고 제 인생에 돈 벌 일은 없는가 보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마음 먹었죠.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 아내도 이런 저를 2~3년 지켜보더니 ‘당신 하는 일이 나쁜 일 같지 않다. 가정은 내가 돈 벌어서 지킬 테니 자기 일을 해봐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생각하면 마음이 참 아픕니다.”

배재고와 단국대에서 농구 선수로 뛰었던 천수길(60) 한국농구발전연구소장은 실업 팀에 가지 못했지만 대한농구협회 총무이사와 홍보이사로 농구와 연을 이어갔다. 하지만 IMF 이후 냉혹한 사회에 부딪치는 아픔을 겪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다가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농구로 꿈과 희망을 주자는 취지로 문을 연 한국농구발전연구소 소장 직함을 받고 인생 2막을 열었다.

천 소장의 손을 거친 팀은 보육원 어린이들로 이뤄진 드림팀(2006년 창단)과 다문화 유소년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2012년 창단)다. “다문화 아이들뿐만 아니라 일반 아이들은 우리 미래의 힘과 에너지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소외되지 않고 좋은 경험을 해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법이죠. 큰 꿈이 큰 사람을 만들잖아요. 농구가 아이들에게 그 매개체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천 소장은 다시 한번 냉정한 현실을 맞닥뜨렸다. 드림팀은 2015년 아이들이 다니고 있던 알로이시오 초등학교가 학생 수 부족으로 문을 닫으면서 해체됐다. 특별히 애정을 쏟았던 글로벌 프렌즈도 코로나19 여파로 도움의 손길이 줄어들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 아이들이 농구할 때만큼은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지 않고 마음껏 뛰어 놀았던 학교 체육관 시설도 문을 닫아 걱정이 크다.

무엇보다 마음이 아픈 건 아이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싸늘한 시선이다. 8년간 아이들 곁에서 지켜본 천 소장의 눈에 우리 현실은 여전히 그들을 차별하고 냉대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이제는 어느 학교에서나 어렵지 않게 다문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학교를 다니지만 중ㆍ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점점 어울리지 못하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하면 더 큰 문제예요. 우리 사회의 소중한 인재가 될 수 자원인데, 남들과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사회 활동을 할 기회조차 못 받는 아이를 봤을 때 너무 답답했습니다.”


다문화 인식 바꾸기 위해 '미운 오리 프로젝트' 가동

사회의 벽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천 소장은 환갑을 앞둔 지난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제2의 인생을 다문화 가정에 관심을 가졌다면 제3의 인생은 다문화 가정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개선하는데 힘을 쏟아보자.” 그래서 올해 ‘미운 오리(어글리 더클링ㆍUGLY DUCKLING)’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이는 안데르센 동화 ‘미운 오리 새끼’에서 영감을 받았다. 또한 미운 오리와 다문화 가정 아이들의 공통 분모도 있다.

“우리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 시대가 됐어요. 생산인구가 감소했죠. 지금은 세계화 추세에 혁신적인 기술이 필요할 때입니다. 그리고 혁신적인 기술은 머리에서 나옵니다. 다문화 이민자가 우리 인구의 5%를 차지하는데, 이들에게서 혁신적인 사고를 가진 인재가 나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갖고 접근해보자는 거예요. 각 국가마다 출산이 줄어드니 이민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잖아요. 그들이 몰려와서 우리에게 해를 주는 게 아니라 우리와 함께 미래를 이끌어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어 ‘미운 오리’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최종 꿈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과 글로벌 프렌즈가 함께 농구를 하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아프리카 이민자로 태어나 사회적 냉대를 받고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접한 농구를 하면서 힘겨운 시간을 극복했다고 들었어요. 그런 대통령이 비슷한 환경에 있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고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준다면 이 아이들도 글로벌 리더가 되겠다는 큰 꿈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시작하게 됐습니다.”

남들이 볼 때 터무니없고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도전이지만 이런 시선은 개의치 않는다. “어떤 일을 추진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아무 일도 못해요. 그나마 전 나이도 먹고 사회 인맥도 있는데, 아무 시도조차 못하면 ‘빽’ 없고 사회 경험도 없는 우리 청년들은 더욱 아무것도 못합니다. 저를 보면서 젊은이들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사회에 과감히 도전해봤으면 좋겠습니다. 100번, 1,000번의 기획보다 한번의 행동이 좋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천 소장의 꿈에 응원하고 도움을 준 사람들도 등장했다. 혼혈 선수 출신으로 농구 국가대표를 지낸 이승준-이동준 형제가 ‘해피빈 펀딩’으로 판매 예정인 의류 모델로 참가하기로 했다. 또 프로골퍼 박성현과 삼성전자 센서사업팀이 다문화가정아동 인식개선사업 지원금 1,000만원, 500만원을 기부했다.

천 소장은 오바마 대통령 만나기 프로젝트에 꼭 함께 했으면 하는 한 명을 콕 찍었다. 농구광으로 알려진 가수 박진영(JYP)이다. “박진영씨는 오바마 대통령과 비슷한 케이스를 가진 분이에요. 연예계에서 튀는 외모 탓에 차별 받고, 미국에서 고생도 많이 했음에도 농구를 잊지 않고 큰 성공을 거둔 리더로 성장했잖아요. 정말 바쁠 테지만 JYP 회사 차원이 아닌 개인 박진영으로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길에 함께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유명인이 함께 한다면 우리의 꿈은 한층 더 현실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김지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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