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한 달 남짓만 지나면 내년 달력을 펼쳐야 하는데 고단한 하루가 이어지는 날들에 쉼표조차 찍기가 버겁기만 하다. 가을의 끝자락을 머금은 단풍도 이미 바람에 날려 사라져 버렸는데 티끌보다도 작은 바이러스는 여전히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따스했던 기억은 이제 아스라하기만 한데 다가올 미래 걱정에 몸과 마음이 시려온다. 과연 우리는 방역과 경제의 이중고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요즘 정신과 진료를 하다보면 올 한 해를 행복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걱정이 든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라는 서문으로 시작된다. 본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슬픈 사연들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최근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일자리를 잃는 등 경제적인 고통을 호소하거나 누군가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고 하소연을 하러 병원에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이 분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공통점은 현재의 고통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무망감이다.
우울한 사람들은 흔히 '나를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나 비록 잠시지만 생각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가능하다. 예를 들면 나보다 더 불행해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래도 내가 저 사람보다는 낫다고 자신을 위로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 '샤덴 프로이데(Schadenfreude)효과'란 남의 고통이나 불행을 보며 기쁨을 느끼는 것을 말하는데 공감의 어두운 그림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시적인 사고의 전환을 통해 얻은 즐거움이 오랫동안 유지될 리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자신한테 주어진 고유한 일을 잘 수행할 때 행복한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도 '돈이나 권력을 가지는 것 역시 행복에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영혼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주장한 플라톤과는 달리 그는 행복한 삶을 위한 세속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며 그 속에서도 스스로 자유롭게 성장하며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하며 이를 '정신적인 탈주'로 명명하였다. 이는 지독한 경쟁사회이면서도 엄연히 금수저가 존재하는 현실을 외면하는 '정신승리'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며 처절하게 살아남기 위한 인지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우울감'이 '내가 꿈꾸는 이상과 실제 현실 간의 차이'라고 정의한다면 '우울의 크기'는 딛고 있는 땅에서 쳐다보는 눈의 각도라고 비유할 수 있다. 만약 모든 상황이 단박에 좋아져 바라던 꿈이 이루어질 확률이 희박하다면 눈높이를 다소 낮춤으로써 그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혀 나가는 것이 우울한 감정을 극복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해결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감의 회복'은 언젠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친 삶에 좌절하면서도 현실적인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동훈이 사채빚에 허덕이는 지안에게 묻는다. "편안함에 이르렀냐고?" 지안(至安)은 대답한다. 지안(智眼) 즉 '지혜의 눈'으로 이런 거지 같은 세상을 극복해 나갈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