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빨치산의 역사, 보수와 진보의 공존을 가르치다

입력
2020.11.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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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전북 남원 지리산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와운마을. 남원 뱀사골의 지리산 토벌 충혼탑을 지나 산을 오르면 빨치산들이 인쇄소로 사용했다는 석실이 나타난다. 커다란 바위들이 겹쳐져 천혜의 아지트를 만드는 곳이다. 와운(臥雲)마을은 다시 한참을 올라가야 나타난다. 말 그대로 구름이 누워있는, 해발 800m의 마을이다. 이곳은 위치 때문에 한국전쟁 동안 빨치산의 세상이었다. 마을의 수호신이자 지리산의 산 증인인 천년송 앞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지리산을 보고 있으니 이 산을 둘러싼 한국현대사가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3개 도, 5개 시와 면. 그렇다. 지리산은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에 걸쳐 있고 함양, 산청, 하동(경상남도), 구례(전라남도), 남원(전라북도)에 자리 잡고 있는 한국 최고의 산 중 하나다. 1,000m 이상 봉우리만 40개가 넘고 뱀사골, 피아골, 빗점골 등 골짜기가 많아 ‘지리산 아흔아홉골’이라고 불렸다. 지금은 종주를 꿈꾸는 등산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산이지만, 그 크기 때문에 근현대사에서 ‘쫓겨난 자들의 땅’이 됐던 ‘슬픈 산’이기도 하다.

동학혁명에서 패배한 농민들부터 의병, 일제 시기 징용·징병 기피자 등이 이곳으로 숨어들었다. 지리산의 장점은 크기도 크기지만, 소백산맥의 끝자락에 위치해 사방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남쪽으로는 광양 백운산으로, 서쪽으로는 순창의 회문산, 동쪽으로는 황매산을 거쳐 합천의 가야산으로, 북으로는 무주의 덕유산을 거치고 추풍령, 속리산, 문경새재를 지나 월악산에 이른 뒤 다시 소백산을 거쳐 태백산맥으로 연결된다.

지리산이 본격적으로 ‘쫓겨난 자들의 땅’이 된 것은 미군정 치하였던 1946년 대구 10월 항쟁, 그리고 1948년 여순사건 이후다. 대구항쟁과 남로당의 불법화 이후 좌파세력이 야산대를 만들어 들어왔고, 여순사건 이후 여수의 ‘반란군’이 올라온 것이다. 이후 1953년 휴전이 선포되고 빨치산이 대부분 소멸되기까지, 지리산은 빨치산과 등치됐고, 해방공간에서 남북한을 통틀어 한반도의 각종 모순이 가장 압축적으로 응집된 곳이 되고 말았다. 이곳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넓은 해방구’였고 ‘대한민국 속의 또 다른 공화국’이었다. '보다 평등한 세상’을 위해 얼어 죽고 굶어 죽을 각오로 올라왔다가 처참하게 쓰러진 많은 농민들과 노동자, 그리고 지식인들의 꿈을 대변했다.

빨치산의 중심에는 남부군사령관 이현상(1905~1953)이 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빨치산이 됐는지, 이들은 어떻게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는지를 이현상의 삶이 잘 보여준다. 1905년 충남 금산 외부리 4백석 부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앙고보 재학시절 6·10만세운동을 주도해 교도소를 다녀온 뒤 공산주의운동에 뛰어들었다. 식민지에서 자본주의는 일제의 것이었기에, 독립운동은 자연스럽게 그 반대 편인 사회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그는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의 한명으로 노동운동을 주도했다. 일제 말기에는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경성콤그룹을 주도하다가 수차례 체포돼 지독한 고문을 당하고 투옥됐다. 하지만 변절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한 철저한 항일투사였다.

해방 후 그는 조선공산당과 남로당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체포됐다. 의열대장 김원봉과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분단과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해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석 차 월북한 뒤 4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강동정치학원에서 유격전 훈련을 받고 내려와, 빨치산투쟁을 주도했다.

안재성의 '이현상평전'에 따르면, 그는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이 군경과 민간인을 학살한 것을 ‘당적 죄악’이라고 비판했다. 민간인은 말할 것도 없고 군경도 교전상황이 아니면 처형을 못하도록 금지했다. ‘구빨치’라고 불리는 이들 빨치산들은 추위와 보급이 어려운 49년 겨울 동안 토벌작전으로 소수만 남고 대부분 소멸하고 만다. 한국전쟁 후 남한의 대부분을 장악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북한군 1만5,000명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신빨치’를 구성했다. 빨치산은 2만명까지 늘어나 지리산 지역을 장악하고 해방구를 만들었다.

누군가는 “우리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는 알면서 이현상은 모른다”고 개탄한다. 하지만 이현상은 48년 말부터 53년까지 5년간 빨치산을 이끈, 게바라 이상의 빨치산 대장이었다. 개인적으로 쿠바 시에라 마에스트라의 게릴라 사령부도, 중국혁명 당시 마오쩌둥이 1만㎞를 도망 다닌 장정도 답사했다. 게바라가 게릴라 활동을 했던 본부는 정글 오지에 위치해 정부군과 별 교전도 하지 않았다. 마오 역시 오지를 도망 다니느라 국민군과 몇 차례 전투를 하지 않았다. 반면에 지리산 빨치산은 좁은 공간에서 5년간 무려 1만 717회나 교전을 했다. 그 과정에서 군경은 6,333명이, 빨치산은 1만1,000명 이상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산에 비하면 쿠바 혁명군은 ‘야영 캠프’에 불과하고, 중국의 장정은 ‘피크닉’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나마 비슷한 건 베트남인데, 베트남도 정글을 통해 인접한 캄보디아 등 국경을 넘나들며 전투를 이어갔다. 남부군 종군기자 출신으로 '남부군'을 쓴 이태는, 지리산은 1만회 이상의 전투 끝에 근 2만명에 가까운 젊은이들이 희생된 “세계유격사상 유례가 드문 엄청난 사건”이라고 기록했다.

빨치산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필요하다. 활동할 수 있는 지리적 공간, 먹고 살 수 있는 보급지원, 주민들의 지지다. 한반도는 애당초 빨치산이 불가능한 지역이다. 쿠바나 베트남처럼 숨을 수 있는 정글도, 베트남처럼 육로로 이어진 이웃나라도, 중국처럼 도망다닐 큰 땅덩이도 없다. 게다가 베트남이나 쿠바와 달리 혹독한 추위와 먹을 것이 없는 겨울을 견뎌야 했다. 이 같은 조건 아래서 5년간 버텼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고 초인적인 의지의 결과다. 빨치산이 되면 제일 먼저 위치를 노출시킬 수 있는 능선과 연기, 소리를 피하라는 3금을 배우고, 굶어죽고, 맞아죽고, 얼어죽을 3대 각오를 다짐했다고 한다.

와운마을에서 지리산을 한 바퀴 돌아 동남쪽으로 달려간 뒤 화개장터에서 올라가면 의신마을이라는 또 다른 오지마을이 나타난다. 거기에서 한 시간 정도 산을 오르면 빗점골이라는 계곡이 있다. 이현상이 사살당한 곳이다. 의신마을에 도착하자 이현상의 눈물인 듯 폭우가 쏟아졌다. 김일성의 남로당 숙청과 관련해 휴전 후인 1953년 9월 17일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하산하다가 사살당했으니 지리산을 떠도는 그의 한이 오죽하겠는가.

북한은 남로당 세력이자 김일성에게 매우 비판적이었던 이현상에게 무기 공급을 중단하는 한편 그를 사실상 ‘적’으로 간주하며 남한이 빨리 토벌해주기를 바랐다.(그러나 그가 죽자 북한은 갑자기 그를 혁명열사로 추대해 예우해줬다) 이 점에서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이현상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며 “그 주검조차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비극적인 인물“이라는 이태의 지적은 적절하다.

결국 답사를 포기해야 했고 장마가 그친 뒤 다시 찾아갔다. 골짜기를 따라 바위들이 이어지는 빗점골에는 원래 이현상 아지트와 사살지를 알리는 표시판이 있었지만 박근혜 정부 때 철거됐다. 대신 누군가 큰 바위에 ‘이현상바위’라고 새기고 그 앞에 작은 추모돌탑을 만들어 놓았다. 그 앞에 서서 지리산에서 죽어간 빨치산과 토벌대, 그 사이에 끼어 쓰러진 민초들을 위해 추모의 묵념을 했다. 그러자 의병·토벌대·빨치산 등 이곳에서 숨진 모든 이를 위해 피아골 연곡사에 세워진 ‘순국위령비’ 중 한 구절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조국을 위해 흘렸던 그 많은 피들은 붉은 잎들이 되었는가? 피아골의 단풍은 해마다 붉기만 하다.”

지리산의 지리(智異)는 ‘다름의 지혜’라는 뜻이다. 지리산의 뜻처럼, 빨치산과 토벌대가 저 세상에서라도 ‘다름의 지혜’를 가지고 서로를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빌었다. 지리산은, 빨치산과 토벌대의 죽음과 죽임의 역사는, 우리에게 보수와 진보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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