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내가 반딧불이라면, 마라도나는 태양이었다”

입력
2020.11.2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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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 단독인터뷰
1986년 멕시코·2010 남아공월드컵서 대결


"축구에 관한 한 20세기 최고의 천재"

아르헨티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6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한 허정무(65) K리그2(2부 리그) 대전하나시티즌 이사장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밤사이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소식에 그는 26일 본보와 전화인터뷰에서 “내가 반딧불이었다면 마라도나는 태양 같은 선수였다”며 “같은 시대에 선수 및 지도자 생활을 한 건 큰 행운이자 영광이었다”며 그를 떠올렸다.

허 이사장과 마라도나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선 선수로,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선 감독으로 맞대결했다. 마라도나는 두 차례 모두 한국에 패배를 안겼다. 허 이사장은 “사생활 논란 등을 떠나 축구에 관한 한 마라도나의 감각과 능력은 20세기 선수가운데 가장 천재적이었다”고 했다.

허 이사장은 자신의 선수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1986년 6월 2일 벌어진 멕시코 월드컵 A조 조별예선 1차전에서 마라도나를 상대했다. 당시엔 한국과 아르헨티나가 맞붙는 것 자체가 뉴스거리였고, ‘몇 대 몇으로 질 것인가’가 정도가 궁금했을 정도로 마라도나의 위용은 대단했다는 게 축구 원로들 얘기다.


"공이 발에 붙어 다니더라"

그러나 허 이사장을 비롯해 차범근, 조민국, 김주성, 최순호 등을 앞세운 거친 수비를 바탕으로 한 저돌적인 공격으로 아르헨티나를 괴롭혔고, 박창선의 한국 월드컵 사상 첫 득점으로 무득점 패배를 모면했다. 아르헨티나에선 발다노가 2골, 루게리가 한 골을 추가해 1-3으로 끝났다. 마라도나는 이날 득점은 못 한 채 도움 3개를 기록했고, 이후 승승장구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최우수선수에게 주어지는 골든볼도 마라도나 차지였다.

그럼에도 허 이사장은 당시 마라도나의 플레이에 대해 “지금 생각해봐도 참 대단한 선수였다”고 말했다. “공이 발에 붙어 다닌다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었다”며 “거칠게 수비하지 않으면 도저히 막을 수가 없는 선수였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새로운 축구영웅 리오넬 메시(33ㆍFC바르셀로나)가 마라도나의 선수 시절 모습과 비슷하다는 게 허 이사장 얘기다.

당시 허정무는 네덜란드 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수비 때는 상대에 몸싸움에서 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특히 마라도나를 향해 거친 태클이 두고 두고 회자됐다. 이날 경기 후 마라도나는 “(한국선수들이)나를 얼마나 때렸는지 모른다”며 “그들은 무려 내게 11개의 반칙을 저질렀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장 지독했던 선수로 ‘한국의 17번’ 허정무를 콕 집어 언급했다.



"'아시아의 진돗개' 별명 얻었지만, 많이 배웠다"

아르헨티나를 넘어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떠오른 마라도나를 월드컵 무대에서 ‘걷어 찬’ 허정무는, 그의 고향(전남 진도군)의 명물에 빗댄 ‘아시아의 진돗개’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각자 지도자의 길을 걸었고,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감독으로 다시 만났다. 그 때도 한국은 메시를 앞세운 아르헨티나에 1-4로 패했는데, 마라도나는 여전히 영리했다.

당시 벤치에서 마라도나와 지략 대결을 펼친 허 이사장은 “마라도나는 경기 전부터 언론을 통해 1986년을 언급하며 한국이 ‘태권도 축구’를 한다고 얘기하는 등 심리전을 펼쳤다”며 “경기 중에도 심판을 향해 지속적으로 어필하는 모습을 보며 판정에 심리적인 영향을 주려 한다는 생각을 크게 받았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세상을 등진 동시대 축구 영웅에게 애도를 표했다. 허 이사장은 “마라도나의 생이 짧다면 짧았지만, 선수로서의 업적에는 진심으로 존경을 표한다”고 했다. “내겐 도저히 잡기 힘든 선수였으며, 그걸 겪어보고 지켜 본 한국 축구에도 큰 가르침을 준 선수였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김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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