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칸 고위 성직자들의 부정부패 등이 적힌 교황청 기밀문서를 언론에 유출해 파문을 일으킨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의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가 54세의 나이로 24일(현지시간) 별세했다.
이탈리아 ANSA통신은 가브리엘레가 지병으로 이날 로마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재위 때인 2006년부터 수행비서이자 집사로 일한 가브리엘레는 교황에게 전달된 비밀 서한 등 교황청 기밀문서 다수를 2012년 이탈리아 출신 탐사기자 잔루이지 누치에게 전달한 인물. 해당 문서에는 바티칸 은행이 돈세탁으로 돈을 벌고, 교황청 고위 성직자들이 거액의 돈을 받고 유명인사와 교황의 만남을 주선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누치는 기밀문서를 바탕으로 교황청 내부 권력 투쟁과 고위 성직자들의 비위를 고발한 책 ‘교황 성하(聖下)-베네딕토 16세의 비밀편지’를 2012년 펴냈고, 이 책은 유럽에서 100만부 이상 팔렸다. 이 사건으로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에서 따온 ‘바티리크스(바티칸 문서 유출)’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을 정도다.
가브리엘레는 자치권을 가진 교황청 사법당국에 의해 문서 절도죄 등 최대 8년형의 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는 혐의로 기소됐지만 바티칸 법원에서 징역 18개월 실형을 선고 받고 2개월 간 복역하다가, 베네딕토 16세의 성탄절 특별 사면으로 출옥했다. 가브리엘레는 바티칸 사법당국의 조사과정에서 “교회청 안에 악과 부패가 만연돼 있는 것을 목도하면서 정신적으로 무너졌고, 더 이상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었다”고 기밀문서 폭로 동기를 밝혔다.
베네딕토 16세는 책이 출간된 이듬해인 2013년 2월 “고령으로 더는 직무를 수행할 힘이 없다”며 사임했다. 베네딕토 16세가 바티리크스에 관해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가브리엘레의 폭로가 그의 퇴임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설이다. 가브리엘레 별세와 관련한 베네딕토 16세의 반응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올해 93세인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내 한 수녀원에서 생활하고 있다.